여권, 4년중임제로 연속 집권 ‘큰 그림’…야권, 국면전환 최상의 카드 ‘수읽기’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휘청거리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6년 10월 24일 시정연설에서 정권의 금기어였던 ‘개헌’을 꺼낸 게 대표적이다. 이후 최순실의 태블릿 PC 발견으로 ‘박근혜의 승부수’는 물거품 됐지만, 김성우 전 홍보수석은 검찰 조사에서 “개헌 논의가 국면전환용이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개헌을 둘러싼 여야의 수상한 움직임이 엿보인다. 이른바 ‘꽃놀이패’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월 1일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는 모습. 국회사진취재단
개헌은 제로섬게임이다. 한쪽이 유리하면, 다른 한쪽은 불리한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나뉘는 게임이다. 모두 ‘윈윈’하기 힘든 이슈라는 얘기다. 실제 개헌 논의가 본격화한 2000년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MB)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 등의 개헌 승부수는 실패로 끝났다. 임기 말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에 시달릴 때나 임기 초·중반이라도 국면전환이 필요할 때 개헌안을 던졌기 때문이다. 국정주도권을 쥔 호헌파 측에선 국면전환의 빌미를 줄 개헌 논의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다만 개헌파의 목적인 ‘판 흔들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문재인 정부에선 초반부터 개헌 논의가 정국 이슈의 축으로 부상했다. 5·9 대선에서 호헌파 프레임에 갇혔던 문재인 대통령조차 선제적으로 개헌 논의를 주문하며 내년 6·13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의 동시 실시를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11월 1일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 시기를 놓친다면 국민이 개헌에 뜻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본권 확대 ▲자치분권 강화 ▲선거구제 개편 등을 제시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문재인 정부가 ‘단계적 개헌’을 통해 사실상 ‘장기집권 프로젝트’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여야 합의가 비교적 수월한 기본권과 지방분권을 개헌한 뒤 선거구제 개편을 전제로 대통령 권력구조를 변경하는 시나리오다. 내년 지방선거 때 ‘1단계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시행할 것이란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권력구조 변경을 위한 ‘원 포인트’ 개헌을 추진했던 것과 판박이다.
1단계 개헌의 핵심은 지방분권, 그중에서도 ‘행정수도 이전’이다. 이는 노무현 정부 초기 때 정국을 뒤흔들었던 사안이다. 극심한 이념 갈등 끝에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을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정부는 플랜B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내세웠다. 현재의 세종시가 탄생한 배경이다. 행정수도 이전은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10여 년 동안 여야 내부에서는 꾸준히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거론됐다.
시동은 걸었다. 문 대통령이 11월 1일 “개헌은 국민의 뜻으로 기본권 강화와 자치분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물꼬를 트자,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같은 달 6일 친노(친노무현)좌장 이해찬 의원과 박범계 의원이 국회에서 공동 주최한 ‘행정수도 개헌’ 국회 대토론회에 참석, “행정수도를 세종으로 하는 개헌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군불을 땠다.
“쌍끌이 전략이다.” 이러한 당·청의 개헌 드라이브를 본 정치권 한 관계자의 말이다. 현재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도는 고공행진이다. 이 국면이라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압승 가능성은 한층 커진다. 이 경우 지방분권을 전제로 한 1단계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동반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방선거 승리·1단계 개헌’을 모두 쥘 수 있다는 얘기다. 장기 집권을 위한 2단계 개헌 추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셈이다.
그다음 화약고는 ‘4년 중임제’다. 이는 문 대통령이 선호하는 안이다. 이 지점이 친문(친문재인) 장기 집권 시나리오의 핵심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한 달 전인 4월 12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 대통령 권력구조와 관련해 “국회가 2018년 초까지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에 부치면 개헌이 완성된다”며 “4년 중임제 시행은 차기 대선을 2022년 전국 동시지방선거와 함께 치러 이때부터 적용하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4년 중임제가 가장 높게 나온다는 점도 문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시나리오가 성공한다면, 문 대통령 등 친문계는 2030년까지 장기 집권을 할 수도 있다. 그 사이 2020년 총선 등의 변수가 있고, 국민정서상 한 진영에 장기 집권을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과 친문계에도 상당한 모험이지만 현재의 국민적 지지를 감안하면 노 전 대통령처럼 승부수를 던져볼 만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판은 깔렸다. 청와대는 부인하지만, 여의도 안팎에선 청와대가 국회 개헌 논의가 지지부진할 경우 내년 초 독자 개헌안에 착수, 3월께 개헌안을 발의할 것이란 얘기가 돈다. 이른바 ‘문 대통령의 독자 플레이’다. 청와대의 독자 개헌안은 4년 중임제를 제외한 기본권 변경·지방분권·선거구제 개편 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알려졌다. 여당 수도권 한 중진 의원은 “개헌은 언젠가는 손봐야 하는 게 아니냐”라며 “내부에서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데 대한 비판 여론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개헌 승부수 성공의 첫 단추는 지방선거 압승이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해 청와대 참모진의 차출설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e스포츠협회’ 사유화 논란에 직격탄을 맞고 사퇴한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후임으로 거론되던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도 충남지사 출마를 이유로 대통령에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청와대 참모진의 전진배치가 가시권에 접어든 셈이다.
당·청의 원사이드 게임이 계속 유지한다면 4년 중임제 개헌투표가 2022년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될 것으로 보이지만, 문 대통령도 국면전환이 필요할 경우 ‘임기단축’을 전제로 한 4년 중임제 개헌 투표를 2020년 총선 때 던지는 안도 배제할 수는 없다. 여당 한 보좌관은 개헌에 찬성하면서도 “임기단축 개헌은 소설”이라고 말했다.
변수는 개헌 저지선(100명)을 확보한 야권의 행보다. 개헌은 국민투표 전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여야 모두 개헌선(200명)은 확보하지 못했다. 개헌 저지선만 확보한 상태다. 자유한국당만으로도 개헌 저지는 가능하다.
다만 야당에서도 비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분권형 개헌에 찬성하는 데다, 지난 대선 때 개헌파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개헌 추진에 찬성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11월 정국에서 속도전을 전개한 것도 다수의 야당 의원이 찬성한 결과였다.
문제는 당·청 개헌 시나리오를 둘러싼 유·불리다. 최근 여권에서 개헌 드라이브를 걸자,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지방선거에서 곁다리로 투표하는 개헌 투표는 내용도, 형식도 맞지 않는다”고 방패 막을 쳤다. 홍 대표는 울산시내 한 호텔에서 가진 시장·군수·구청장 총회 특별강연을 통해 “개헌은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라며 이같이 말했다. 보수발 정계개편에도 지방선거 패배가 현실화되자, 문 대통령의 개헌 전략에 첫 제동을 건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말장난·거짓말 퍼레이드를 멈추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홍 대표는 개헌투표의 시기를 반대했을 뿐, 개헌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홍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4년 중임의 분권형 개헌 및 양원제를 주장했었다. 문 대통령의 개헌 노림수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만큼, 당·청의 개헌 구상을 최대한 막고 ‘홍준표식 개헌안’을 던져 국면을 유리한 구도로 끌 것으로 보인다.
다른 야당 대권주자도 개헌 찬성파다. 지난 대선 때 등판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분권형 개헌,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4년 중임제,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의원내각제를 각각 주장한다. 블랙홀 이슈인 개헌은 소수파에도 국면전환을 위한 최상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개헌안 추진은 이들에게도 ‘꽃놀이패’다. 개헌발 정계개편의 승자는 ‘개헌이냐, 호헌이냐’가 아닌 타이밍을 둘러싼 수 싸움이 결정한다.
윤지상 언론인
김종인 개헌정국 역할론 주목 …‘선거 전 등판 기회 온다’ 세월낚시 개헌 발 정계개편 과정에서 주목 대상 1순위는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김 전 대표는 5·9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친문(친문재인)계를 ‘호헌파’ 프레임에 가두려고 시도한 대표적인 개헌파다. 김 전 대표는 대선 때 개헌을 고리로 반문(반문재인)연대를 추진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김 전 대표의 중간지대 플랫폼 구상은 반문진영이 막판 뒤집기를 할 유일한 카드였다. 김 전 대표의 최근 행보는 그야말로 ‘로우키’다. 11월 2일 ‘김종인의 경제민주화’ 출판기념회 이후 조용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5·9 대선 이후 첫 행보였다. 김 전 대표는 당시 정계개편에서 ‘김종인 역할론’ 가능성에 대해 “역할은 없다. 역할은 끝났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치행보의 신호탄이냐’는 질문에도 “천만의 말씀”이라고 일축했다. 일각에선 김 전 대표가 포럼 구성을 고리로 내년 지방선거 국면에서 정치적 기지개를 켤 것으로 전망한다. 앞서 김 전 대표는 지난해 9월 경제민주화 실천을 위한 전문가그룹인 ‘경제포럼’을 구성한 바 있다. 김 전 대표는 당시 경제민주화 관련 토크쇼 및 강연을 잇달아 열고 사실상 야권 대선주자 플랫폼 구축에 나섰지만, 존재감과 파급력 확보 실패로 유야무야됐다. 김 전 대표는 출판기념회에서 ‘포럼’ 결성 가능성을 묻자, “쓸데없는 사람의 얘기”라며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김 전 대표가 암중모색 행보에 나선 것은 제3 정치세력의 공간 축소와 무관치 않다. 대선 당시 호헌파 프레임에 갇혔던 문 대통령은 내년 6·13 지방선거 때 개헌안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한 여야 정치권도 개헌안 추진에 긍정적이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문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등이 개헌을 주장하는 마당에 김 전 대표 등 제3 진영이 판을 주도하기는 어렵다”라며 “난항 등 위기상황일 때나 국민이 새로운 선수의 등판을 원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대선이 ‘호헌파 vs 개헌파’로 양분된 것과 달리,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개헌파 일색인 상황에서는 김 전 대표가 등판할 명분도 실익도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 당·청 지지도의 고공행진으로 판의 변화가 요원한 점도 ‘김종인 역할론’의 포지션을 축소했다. 다만 지방선거 국면이 본격화하는 내년 초 개헌안이 각 정파의 이해관계가 얽혀 옴짝달싹 못 할 경우 제3지대 공간의 물꼬가 트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개헌판에서 종속변수로 전락한 김 전 대표의 생존전략은 중간지대 플랫폼 구축이 될 전망이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