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DJ 적통자” 치열한 후계전쟁
▲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을 마친 정세균 대표가 지난 10일 병원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
기적적인 쾌차를 바라는 정서가 대부분이지만 정치권 주변에선 ‘DJ 변고’라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DJ마저 변고를 당할 경우 여야 정치권은 또다시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특히 범야권은 거물들의 ‘포스트 DJ’ 경쟁과 맞물려 패권 전쟁이 본격화될 것이고, 차기 대권지형도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범야권 일각에선 벌써부터 ‘DJ 적통자’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형국이다. ‘DJ 위독설’이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 본격화되고 있는 범야권 ‘잠룡 빅3’의 치열한 ‘포스트 DJ’ 경쟁 속으로 들어가 봤다.
DJ는 민주개혁 진영의 대부이자 호남의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 따라서 ‘포스트 DJ’ 자리는 호남의 새 맹주이자 민주개혁 진영의 뉴 리더로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는 유리한 고지나 다름없다. 대망론을 꿈꾸고 있는 범야권 잠룡이라면 누구나 욕심나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
범민주계 거물들의 ‘포스트 DJ’ 경쟁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치열하게 전개돼 왔다. ‘국민의 정부’ 중후반부터 잠룡들을 중심으로 DJ의 정치이념과 철학을 승계할 이른바 ‘DJ 적자’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DJ는 그때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자신의 후계자를 지목한 적이 없다. 다만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숱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광주 경선을 기점으로 대역전극을 연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DJ와 동교동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회자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DJ가 “내 몸의 한 쪽을 잃은 것 같다”며 애통해 했다는 사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DJ의 각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DJ가 노 전 대통령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는 노 전 대통령을 통해 민주개혁 진영의 정권 승계를 이끌어냈다.
문제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DJ의 정치적 자산을 계승·발전시킬 뚜렷한 적자가 부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호남 맹주 자리는 그야말로 무주공산인 상태고 민주당내 계파 갈등은 여전히 수면 아래서 꿈틀 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민주개혁 진영의 한 축인 친노 그룹 일각에서는 ‘친노 신당’을 창당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범민주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DJ의 신변에 변고가 생긴다면 민주개혁 진영은 또다시 극심한 분열 국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는 범민주계 잠룡들을 중심으로 ‘포스트 DJ’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병 정국’을 기폭제로 DJ를 끌어안고 차세대 호남 맹주 나아가 민주개혁 진영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거듭나겠다는 잠룡들의 대권 전략과 맞물려 ‘포스트 DJ’ 경쟁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무소속 정동영 의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이른바 범민주계 ‘잠룡 빅3’가 경쟁하듯 DJ 병문안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을 찾고 있는 것도 ‘포스트 DJ’ 경쟁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범민주계와 ‘잠룡 빅3’ 진영 주변에선 벌써부터 ‘DJ 적자’ 논쟁이 가열될 조짐마저 감지되고 있다.
특히 정 대표는 당 대표 프리미엄을 활용해 ‘포스트 DJ’ 경쟁에서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 대표는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 이후 의원직을 던지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장외투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정 대표의 강성 행보 배경에는 ‘미스터 스마일’이라는 유연한 이미지를 벗어나 야성을 키우고,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중적 지지도를 높이기 위한 중장기 대권 전략이 투영돼 있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 (왼쪽)정동영 의원, 손학규 전 대표 | ||
박 의원은 특히 조문정국 이후 민주당 중심의 범민주계 대통합론을 주창한 DJ의 뜻을 적극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정 대표 입장에선 이런 박 의원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것이다. 또한 DJ가 지향했던 정치적 가치와 자산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포스트 DJ’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분위기다. 민주당 주변에선 대권을 겨냥하고 있는 정 대표와 호시탐탐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는 동교동계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이른바 ‘정세균-박지원 밀월설’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범민주계의 유력한 차기주자로 분류되고 있는 무소속 정동영 의원과 손학규 전 대표도 ‘포스트 DJ’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있다. 8월 8일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 초청강연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던 정 의원은 DJ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12일 급히 귀국해 병원을 찾았다. 정 의원은 이날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DJ 때문이다. DJ는 정치적 사부였다”고 말해 DJ와의 정치적 인연과 존경심을 부각시켰다. 정 의원은 또 “DJ가 이루고자 한 남북평화와 한반도 냉전 해체 과업을 참여정부에 참여하면서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다시 쾌차하셔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자신만이 DJ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고 있는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적임자임을 강조한 발언으로 해석되고 있다.
정 의원 측은 “정 의원이 2007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DJ를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의 물밑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DJ 적자=정동영’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정 의원도 자신의 최대 현안인 민주당 복당론에 박지원 의원이 찬성하고 있다는 점에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의 미디어 관련법 무효화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등 민주당과의 스킨십을 강화하고 있는 정 의원은 박 의원을 비롯한 동교동계와의 물밑 접촉을 확대하면서 ‘포스트 DJ’ 경쟁에 적극 뛰어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총선 패배 후 강원도 춘천의 한 시골에서 칩거하고 있는 손 전 대표도 ‘문병 정국’을 맞아 ‘DJ 끌어안기’에 주력하고 있다. 손 전 대표는 DJ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8월 10일 서울로 상경해 곧바로 DJ 병문안을 했다. 그는 이날 “위독하시다는 보도를 보고 놀라기도 하고 마음도 황망하고 그동안 강원도에 있으면서도 쭉 기도를 했다”며 DJ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손 전 대표는 문병 정국이 장기화되거나 DJ 신병에 변고가 발생할 경우 범야권 정치지형 및 차기 대권구도가 크게 흔들릴 것으로 판단하고 정치 재개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뜩이나 장기간 칩거로 인해 존재감이 상실되고 있는 데다 범민주계 대권 경쟁자인 정 대표와 정 의원이 ‘포스트 DJ’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없다는 위기감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손 전 대표는 수원 장안이 10월 재보선 지역으로 확정(8월 20일 대법원 판결 예정)될 경우 이 지역 출마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정치 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2007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손 전 대표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일부 참모들을 중심으로 ‘서대문 캠프’가 다시 가동되는 등 손 전 대표 복귀를 염두에 둔 정지작업이 차분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손 전 대표가 정치 재개를 선언할 경우 ‘포스트 DJ’ 경쟁 구도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손 전 대표는 정 대표나 정 의원처럼 호남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DJ와 각별한 정치적 인연을 맺어온 관계도 아니다. 잠재적 대권 경쟁자인 두 사람에 비해 ‘포스트 DJ’ 경쟁에서 밀릴 수 있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손 전 대표 측은 손 전 대표가 호남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8월 12일 기자와 만난 손 전 대표의 한 측근은 “‘포스트 DJ’는 출신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DJ의 정치적 자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인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며 “출신지 및 DJ와의 인연을 평가 기준으로 한다면 ‘포스트 DJ’ 경쟁은 호남 맹주 싸움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손 전 대표 측은 특히 지난해 1월 손 전 대표가 당 대표 취임 인사차 동교동을 방문했을 때 DJ가 손 전 대표에게 ‘50년 전통야당의 계승자’로 평가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DJ의 정치적 자산을 승계하고, ‘탈 지역주의’에 기초한 범민주계 통합론을 기치로 ‘포스트 DJ’ 경쟁을 주도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게 손 전 대표 측의 청사진이다.
삼복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는 ‘문병 정국’에서 ‘포스트 DJ’ 경쟁과 맞물린 범야권 ‘잠룡 빅3’의 대권 생존게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