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안파는 통추위원장 맡겨 ‘박·정·천’ 내치기, 호남파는 비대위원장 맡겨 ‘안철수 고사작전’ 모색
손 고문의 길은 둘 중 하나다. ‘통합의 키맨’과 ‘분당의 마중물’이다. 이 고차방정식을 푸는 첫 단추는 ‘손학규 역할론’의 해부다. 판은 깔렸다. 친안(친안철수)계와 호남파 모두 손 고문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모양새다. 마지막 퍼즐은 ‘타이밍 잔혹사’를 끊어내는 손 고문의 리더십이다.
손학규 국민의당 상임고문. 이종현 기자
“제7공화국 건설에 중도통합 세력이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손 고문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던진 말이다. 손 고문은 출국 후 기자들과 만나 “현시점에서 나라의 안정과 통합, 번영을 위한 국민의당의 역사적 책무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연합정치를 제도화하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해야 할 소임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다”며 “나의 마지막 티끌 같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한다”고 역할론을 시사했다.
친안계와 호남파 움직임도 빨라졌다. 양측 모두 “손 고문은 우리 편”이라며 강력한 러브콜을 보냈다. 손 고문을 지렛대로 활용, 통합(친안계)과 독자생존(호남파)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안철수 대표는 손 고문이 미국에 있는 동안 통합 등 당내 상황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대표는 11월 19일 대전·충청권 당원 간담회 후 취재진과 만나 손 고문의 귀국에 대해 “당 구성원의 일원으로 역할을 해주시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도 손 고문과 직접 통화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은 손 고문이 2007년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을 탈당하기 직전까지 한 지붕 아래 있었다. 이른바 ‘안철수·유승민·손학규’ 연대에 군불을 지핀 셈이다. 그간 양당 통합파 내부에선 ‘통합추진위원장’을 손 고문에게 맡겨야 한다는 여론이 컸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손학규 역할론’은 통합에 반대하는 호남파 3인방 박지원·정동영·천정배 의원을 내치는 카드인 셈이다. 국민의당은 12월 21일 호남파 반발 속에서 당무위원회를 열고 바른정당과 통합 여부를 묻는 ‘전 당원 투표’를 실시키로 의결, ‘손학규 역할론’은 한층 증폭하는 모양새다.
반면, 호남파 회심의 카드는 ‘안철수 고사작전’이다. 호남파 내부에서 ‘손학규 비상대책위원장 카드’가 급부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손 고문이 당분간 비대위를 이끄는 사이, 전당대회를 통해 호남파가 원하는 ‘세대교체’를 꾀하는 시나리오다. 일각에선 호남파가 원하는 것은 ‘안철수 체제’ 종식인 만큼, 안 대표가 내려오는 순간 호남파의 원심력은 한층 약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호남파의 대표 격인 박지원 의원은 그간 “손 고문이 서울시장에 나가야 한다”며 ‘손학규 띄우기’에 나선 바 있다. 야권 한 관계자는 “친안계와 호남파가 사생결단하는 상황에서 손 고문은 양측을 한발씩 물러나게 하는 효과는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손학규 역할론’의 방향을 놓고는 전망이 엇갈린다. 통합파에선 손 고문이 호남파와 결별을 선언하고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통합신당 열차에 탑승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경우 호남파는 탈당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다른 하나는 양쪽을 중재, 야권통합 재편의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2012년 총선 직전 민주당과 혁신과통합, 한국노총 간 ‘야권 중통합’의 승부수를 던진 것도 손 고문이었다.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손 고문이 호남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 적자 경쟁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친안계·호남파·손 고문·바른정당의 이해관계가 극명하다는 점이다. 안 대표 측 내부에선 유승민 대표가 요구하는 호남파 3인방은 물론, 바른정당 소속이자 구 한나라당 쇄신파 3인방인 남경필 경기지사·원희룡 제주지사·정병국 의원 등을 배제하는 통합을 원한다. 앞서 남 지사는 한국당과의 통합을 골자로 하는 보수대통합을 주장했고, 원 지사는 이에 대해 “앞서나간 측면이 있다”며 “(한국당을) 나갈 때 제일 빨리 나가던 사람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정 의원은 같은 당 이학재 의원 등과 함께 한국당과 바른정당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 한때 유승민 대표와 함께 자강론에 섰던 남·원·정은 국민의당과의 통합에 대해 “햇볕정책과 호남 지역주의를 포기해야 통합 논의가 가능하다”고 제동을 건 상태다. 호남파는 ‘통합 철퇴’ 작전으로 맞서고 있다. 천정배 의원은 “안 대표가 통합을 하겠다는 건지, 분열을 하겠다는 건지 이제 알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힐난했다.
안 대표의 마이웨이에도 이유는 있다. 지역정가에선 차기 전남지사 출마를 노리는 박 의원이 안 대표와 가까운 주승용 의원에게 당내 경선에서 패할 것을 우려, ‘탈당 명분 쌓기용’ 어깃장을 놓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전북지사 출마를 고심 중인 오른 유성엽 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단기필마의 무소속 출마를 해도 백중지세를 꾀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 대표 측 관계자는 “통합신당일 때 호남 지지도는 더 높아진다”며 호남파의 영향력을 평가 절하했다.
마주 달리는 파국 열차의 마지막 퍼즐은 손 고문이 쥐고 있다. 손 고문은 귀국 직후 인천국제공항 인근 식당에서 지지자들과 가진 만찬회동에서 “(당) 혁신은 통합에서부터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통합신당 역할론에 무게를 둔 셈이다. 다만 친안계도 호남파도 손 고문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손 고문의 ‘제한적 역할론’도 이 지점에서 파생한다.
손 고문에게는 크게 세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손 고문이 통합추진위원장이든 비대위원장이든 맡아 6·13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한 뒤 승리로 이끌어 재기의 발판을 모색하는 시나리오다. 손 고문의 서울시장 도전 등 ‘험지 출마설’도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난파선에 처한 상황에서 존재감을 확보,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대표적 사례는 고 김대중(DJ)·박근혜 전 대통령 모델이 있다.
실제 정계은퇴를 번복한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1995년 첫 민선시장 선거인 6·27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조순 전 서울시장 선거를 지원, 무소속 돌풍을 일으킨 박찬종 전 의원을 꺾는 데 1등 공신이 된 후 같은 해 7월 동교동계를 이끌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2004년 17대 총선 때 탄핵 역풍 속에서도 제2당(121석)을 만든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비대위원장을 맡아 제1당(152석)에 오르게 한 뒤 그해 18대 대선에서 대통령까지 당선됐다.
전문가들 평가는 엇갈렸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손학규 역할론’의 영향력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기의 교두보로 삼을 만한 ‘지역 기반’이 없는 데다, 통합신당 내 ‘자기 세력도 미비하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다.
87년 체제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이 두 가지를 확실히 잡아 대권 고지에 올랐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부산·경남(PK)과 상도동계, DJ는 호남과 동교동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호남+알파(PK)에다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대구·경북(TK)과 친이(친이명박)계, 박근혜 전 대통령은 TK와 친박(친박근혜)계, 문재인 대통령은 호남+알파(PK 및 탄핵 정국)와 친문(친문재인)계 전폭적 지지로 대권 여의주를 잡았다.
손 고문이 사실상 ‘이회창의 길’을 걷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는 2007년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15% 이상 득표율을 기록한 뒤 자유선진당을 창당했지만, ‘MB와 박근혜’라는 보수의 큰 산을 넘지 못했다. 이 전 총재가 충청 지역주의에 묶인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손 고문도 문재인 대통령과 친문계가 있는 한 호남 및 진보개혁진영에서 영원한 2인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한 분석가는 “손 고문이 귀국해도 호남 민심은 손 고문보다는 안철수 대표를 보면서 지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며 “결국 비문진영에서 독립변수는 안 대표다. 손 고문은 독립변수에 따라 결정되는 종속변수”라고 잘라 말했다. 문 대통령의 모델인 ‘당권 접수 후 대권 직행’도 사실상 어렵다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
구손학규계 주군 귀국에 복잡한 심경 왜? 뿔뿔히 흩어져 ‘각자도생’ 손학규 국민의당 상임고문 귀국을 바라보는 구 손학규계의 심정은 복잡하다.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때까지만 해도 손 고문을 정치적 스승 삼아 동지 관계를 형성했으나, 지금은 각자도생하고 있어서다. 지난 5·9 대선 당시 손 고문이 제7공화국을 앞세운 개헌론으로 판 흔들기에 나섰을 때, 그를 지켰던 이는 이찬열 국민의당 의원 정도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옛 주군을 바라보는 신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랬다. 한때 구 손학규계는 친노(친노무현)계 다음으로 정세균계와 함께 막강 조직력을 자랑했다. 18대 대선 당시 손학규 캠프는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인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홍재형 전 국회 부의장 등이 공동 선거대책위원장,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이 상임고문을 맡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포스트 후보군에 오른 이 총리는 현재도 손 고문과 개인적 연락을 하고 있다. 선거대책본부도 원조 손학규계와 비노(비노무현)계가 힘을 합쳤다.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전략기획,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 후임으로 거론됐던 정장선 전 의원은 조직 총괄책,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는 선거대책위 부위원장을 각각 맡았다. 충남지사 출마를 선언한 양승조 의원은 직능부문 수장이었다. 현역인 설훈(인재영입) 오제세(정책) 민주당 의원 등도 포진했다. 이춘석 의원은 ‘저녁이 있는 삶 본부’를 총괄했다. 신학용(특보단) 김우남(농어업) 최원식(원내 비서실장) 전 의원 등도 손학규 캠프 일원이었다.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대외협력을, 김유정 전 의원은 공동대변인, 전정희 전 의원은 ‘맘 편한 세상 본부’를 각각 총괄했다. 친노계 한 보좌관은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손학규·김두관·정세균 캠프 가운데 정책 콘텐츠와 인물, 조직력 측면에서 손학규 캠프가 비교우위에 섰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14년 7·30 재보선 패배 이후 손 고문의 정계은퇴를 기점으로 손학규계는 사실상 와해의 길을 걸었다. 이듬해 11월 2일 서울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이 총리가 마련한 만찬에 손학규계 인사들이 모이면서 재결합에 시동을 걸 것으로 관측됐지만, 20대 총선과 19대 대선에서 뿔뿔이 흩어지면서 구 손학규계는 막을 내렸다. 손 고문의 귀국에도 구 손학규계 인사들이 각자도생할 것이란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민주당 구 손학규계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이와 관련해 “움직일 가능성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른 의원도 “야권 분열은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신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한 분석가는 “손 고문의 파괴력이 예전만 못해 민주당에서 탈당할 인사는 없겠지만, 분당 열차의 기적 소리가 울린 국민의당 계파 갈등에서 손 고문의 존재감은 다소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