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접촉·스펙쌓기 등 안땐 굴뚝 연기 자욱…청와대 “억측 왜곡 보도 유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진 뒤 청와대 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정무수석 등 핵심 참모들은 당시 박 대통령 얼굴을 쳐다보기 힘들었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넓디넓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는 고백이었지만 적잖은 국민들은 대통령과 참모들의 소통 부족과 함께 국정이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돌아갔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드러냈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달라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참모들과의 소통이 어려운 본관 근무를 뿌리치고, 참모들이 일하는 여민1관으로 집무실을 옮겼다. 상식적으로도 그렇고, 지금 청와대 여민1관의 구조도 그러하고, 대통령 집무실과 가장 가까운 방의 주인공을 찾으라면 단연 임종석 비서실장이다. 인터폰을 한 뒤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도 하지만 바쁘면 계단 몇 개만 후다닥 뛰어올라가 대통령을 대면해 업무보고를 한다는 사람이 바로 임 실장이다. 대한민국 국정 최고 책임자에게 가장 빠르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실력자’가 임 실장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세간을 뒤흔든 발표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 최고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임 실장이 중동 특사로 파견됐다는 청와대 발표가 나온 것이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북측 고위 인사를 만나러 간 대북 특사 차원이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큰 자리’를 맡기기 위한 몸집 불려주기 차원이다” 등의 각종 해석이 쏟아졌다. 도대체 그는 왜 갑자기 중동 특사가 된 것일까.
문재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아랍에미리트(UAE)와 레바논을 방문 중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10일(현지시간) 오후 UAE 아크부대를 방문해 임무 수행중인 장병들을 격려했다. 사진=청와대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12월 10일 춘추관 브리핑에서 임 실장이 아랍에미리트(UAE) 아크부대와 레바논 동명부대에 가 있는 장병들을 격려하고, UAE 왕세제와 레바논 대통령을 예방하는 외교 일정을 수행한다고 발표했다. 임 실장은 10일 UAE 도착 후 쉐이크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왕세제를 접견하고 양국 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임 실장은 서주석 국방부 차관, 윤순구 외교부 차관보, 청와대 행정관 두 명과 함께 민항기 편으로 현지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병들에게 준 선물로는 문 대통령 사인이 들어간 벽시계를 가져갔다고 한다. 박 대변인은 “이번 특사 방문은 문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중동지역에서 평화유지 활동 및 재외국민 보호 활동을 진행 중인 현장을 점검하고 우리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했다.
임 실장은 UAE와 레바논 일정을 마치고 난 뒤 12일 새벽에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 출발 날짜인 13일 오전 성남 서울공항에서 밝은 표정으로 문 대통령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어느 때보다 표정이 환했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목격담이다.
임 실장의 특사 파견 발표 이후 청와대 안팎에서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크게 소리를 낼 지경으로 입방아가 많았다. 특사 파견 배경을 놓고 다양한 해석과 추측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객관적으로, 또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특사 파견 이력을 살펴봐도 임 실장의 특사 파견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특사 파견은 2003년 참여정부 초대 문희상 비서실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경축 특사로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에 파견된 이후 14년 만이었다.
결국 ‘특수 임무’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청와대 입장 발표와 달리 대통령 비서실장이 특별한 임무를 갖고 중동으로 떠났다는 해석이다. 우선 대북 특사설이 나돌았다. 임 실장이 중동 현지에서 북측 인사들을 접촉했다는 얘기다. 역대 정권에서 비밀리에 북측 인사를 접촉한 것은 대통령 최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대북 특사설이 가장 객관적 분석이라는 예측이 나돌았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에도 이명박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할 수 있었던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선전부장을 만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을 논의하고자 비공개로 접촉한 전례가 거론됐다.
임 실장의 방문지가 아크부대와 동명부대라는 점도 의문을 증폭시킨 계기가 됐다. 아크부대와 동명부대는 불과 한 달 전에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격려 방문을 다녀온 곳. 국방장관이 다녀온 곳을 굳이 비서실장이 또 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만들어졌다.
정치권에선 임 실장이 특사로 간 것에 대해 과거의 ‘투쟁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정치인으로서의 다양한 이력 쌓아주기를 위한 배려용이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임 실장은 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시절,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전투병 파병에 반대하며 12일간 단식농성을 한 적이 있을 만큼 해외 파병에 대해서는 평소 분명한 반대 입장을 드러내왔다.
그는 2003년 10월 농성 당시 “정부가 끝내 대규모 전투병 파병을 결정하고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강경론을 내놓은 바 있다. 열린우리당이 이라크에 비전투병을 파견하는 쪽으로 당론을 정하고서야 임 실장의 단식농성이 끝이 났다.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던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파병이 논의될 당시 진보…개혁진영의 반대는, 정부가 최소 규모의 비전투병 파병으로 결정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썼다.
문 대통령이 자칫 내치 경험만 잔뜩 쌓을 수밖에 없는 비서실장에게 ‘밖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얘기도 나온다. 비서실장은 청와대를 지켜야 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해외 순방을 나가기 어려운데 해외를 다녀오는 방법은 특사로 나가는 길이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다.
임 실장에 대한 ‘몸집 불리기’ ‘경력 쌓아주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어찌됐든 16·17대 재선 의원 출신인 임 실장이 86그룹(80년대 학번·1960년대생)의 선두주자 중 한 명으로서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또는 전남지사로서 차출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임 실장은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어 그 어는 정치인보다 스펙트럼이 넓다는 평을 받는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필승 카드로도 꼽힌다.
청와대는 임 실장의 특사 파견을 둘러싸고 나온 이야기들은 모두 ‘허구’라는 입장이다. “임 실장이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 의장 시절 ‘임수경 방북 사건’을 주도한 이력이 있어 북측과 접촉하는 데 어느 정도 적임자가 아니냐는 얘기까지 있다”는 물음에 대해 청와대 한 관계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여러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 방송사는 “임종석 실장이 중동을 방문한 것은 우리 군의 평화유지 활동을 점검하고 격려하는 것이지만, 방문의 진짜 이유는 MB비리 문제가 관련 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한 방송사의 확인되지 않은 과감한 보도에 유감을 표명한다”며 보도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청와대는 임 실장 특사파견에 대해 파견 부대 방문이 주된 목적일 뿐 박수현 대변인이 발표한 내용 외에 다른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 ‘북한 관계자를 접촉하거나 원전 관련 일정처럼 공개하지 않은 일정은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그런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편 대통령 비서실장이 특사로 파견됐을 때 ‘특수 임무’가 아니라 평범하고 일상적 임무를 수행한 때도 많았다는 것이 청와대 근무 경험자들의 전언이다. 1997년 12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말레이시아에 특사로 파견한 김용태 비서실장은 김 전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당시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아세안 정상회의에 불참하게 된 데 양해를 구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이범석, 함병춘 비서실장 등을 수차례 특사 자격으로 외국에 보냈는데 대부분 다른 나라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거나 현지 지도자를 예방해 전 전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는 수준의 임무를 수행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청와대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는 다른 정부와 차별화하기로 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해도 국민들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임무를 만들고 이를 수행하는 시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 정부의 기준이다. ‘정치인 임종석’을 키우기 위해 특정 국정 임무를 맡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임 실장도 여러 차례 불출마 의견을 밝힌 상황이라 문재인 정부 1기를 성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특사 파견을 둘러싸고 갖가지 해석이 나온 것은 이 정부의 기준에 빗댄다면 그야말로 과잉 해석일 뿐”이라고 말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