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책벌레 ‘선상님은 호기심왕’
▲ 독서광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주일에 책 열 권 이상을 섭렵할 정도로 상당한 독서가였다.출처=<기록 김대중 70년> | ||
국가 리더인 동시에 한 자연인이자 남편이며 아버지였던 ‘인간 김대중’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지인들은 그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는지, 이들의 회고를 통해 그의 인간적 면모를 재조명해 보았다.
#못 말리는 학구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 상당한 독서가로 알려져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세가 악화될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그가 손에서 책을 놓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책 읽을 시간이 없다며 주변에 “감옥에 한 번 더 가야할 모양”이라는 농담까지 건넸을 정도.
그의 동교동 집을 오랫동안 감시해왔던 한 전직 형사는 “(총재 시절) 김 전 대통령은 하루 종일 만나고 접대하는 인사가 많을 때는 600명 선, 적을 때에도 200명 정도는 되었다. 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나서도 그의 2층 서재는 매일 어김없이 밤 1시가 되어서야 불이 꺼졌다. 김 총재는 그만큼 책읽기를 좋아했고 독서량은 실로 엄청나서 평균 일주일에 12권 정도는 읽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치인들도 상대해 보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 중 누구도 김 총재처럼 책을 읽거나 연구하는 자세를 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중반 무렵 미국의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을 찾았던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남다른 학구열을 보여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동행했던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DJ는 인류의 조상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특별히 우리를 안내했던 유인원 전문가와 함께 그는 오후 내내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피면서 인간의 두개골 발전과 유인원의 진화에 관한 수많은 질문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굉장한 호기심과 정열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전문가가 ‘박물관을 찾는 정치인들이 있지만 DJ만큼 깊은 이해와 관심으로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정치인은 본 적이 없다’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았다”고 밝혔다.
그의 학구열은 영어공부에도 이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은 1974년 무렵 그의 나이 50세가 넘어서였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어는 유창했지만 영어는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희호 여사가 통역을 위해 곁에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과 기자들이 매일 수십 명씩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한편 홀로 영어공부를 꾸준히 한 결과 나중엔 기자회견을 영어로 할 정도까지 되었다고. 김 전 대통령의 통역을 맡았던 변주경 씨 또한 “영어가 수준급이었던 (김 전) 대통령께서 통역을 듣고 있다가 내가 빠뜨린 부분이 있으면 무안하지 않게 배려하며 지적해주시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 벗과 함께 평소 꽃 가꾸기와 강아지 돌보기를 특히 즐겼던 김대중 전 대통령. | ||
3공화국 박정희 정권부터 5공화국 전두환 정권까지 김 전 대통령은 투옥과 연금이 반복되는 어려운 삶을 살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가택연금은 전경 400~500명을 차출해 동교동 주변을 아예 에워싸게 할 정도로 철저한 봉쇄조치였다. 이발도 집에서 이희호 여사가 직접 가위로 해주었고 몸이 불편한 김 전 대통령의 목욕은 비서진까지 거들어야 했다고 한다.
이 시절 김 전 대통령의 ‘감시’를 담당했던 전직 형사 이열 씨는 “가족과 비서진 연금은 물론 심지어 가정부까지 연금했는가 하면 종교행위를 불허하고 식생활에 필요한 생필품과 생계비 반입까지 불허했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동교동의 가정경제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 이 씨는 “그 때 맏아들 홍일 씨가 신촌에 갈비집을 차린 것도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한번은 김홍일 씨가 생활비 200만 원을 집으로 반입하려다 제지를 당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애태우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집 앞에서 감시를 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 이 씨는 “나도 정보과 형사이기 전에 한 인간이다. 당국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도저히 보고 있기가 괴로워서 그 돈을 받아 몰래 비서에게 전달해 주었다”고 밝혔다.
그런 사정을 아는 후원자들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동교동 집을 돕기도 했다. 후원물품의 반입도 제재를 받자 ‘케이크 상자’ 속에 돈 봉투를 넣어 전달했다는 것. 그때 동교동 경호팀은 혹시 폭발물이나 위험물이 있지 않을까 해 반드시 상자를 개봉해보아야 했으나 비서진들은 “지지자들이 정성껏 마련한 봉투를 적든 많든 공개한다는 것은 안 된다”며 그 이후에도 공개하지 않은 채 들여갔다고 한다. 한 지지자는 해산물을 싱싱한 채로 전하고 싶어 목포에서부터 산낙지 등을 양동이에 넣고 바닷물을 채워 달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이렇게 해산물을 나르는 지지자를 보며 당시 동향 체크를 하던 안기부 요원까지 감탄했다는 것.
#선생님의 ‘세 가지 낙’
김대중 전 대통령은 특히 꽃을 좋아했다고 한다. 동교동 연금 중일 때에도 보통 아침 다섯 시 반이면 일어나 꽃을 가꾸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는데 꽃 하나하나의 냄새를 맡으며 입맞춤을 하듯이 정성을 들였다. 집에는 화초를 보관하거나 기를 수 있는 작은 온실까지 있었다. 화원을 하는 사람들이 ‘꽃박사’라고 할 정도로 꽃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다고 한다.
한번은 비서진 한 명이 김 전 대통령의 심부름으로 꽃을 사러 갔는데 몇 군데를 돌아다녀도 아무도 그가 적어준 꽃 이름조차 모르더라는 것. 결국 가장 오래된 꽃집을 찾아갔더니 주인은 “이 꽃은 아무데나 있는 게 아닌데,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르는 것인데…”라며 의아해 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이 감옥 안에서도 정성껏 꽃을 가꾸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 전 대통령이 이희호 여사에게 보냈던 편지 중 한 구절. “운동하러 뜰에 나가면 국화가 한창인데 전부 노란색의 것뿐입니다. 내가 돌봐준 화단의 꽃들은 열심히 가꾸어준 보람이 있어서 피기도 훨씬 싱그러웠지만 견디는 것도 다른 데 비해서 거의 한 달을 더 견디어 주어서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꽃을 손볼 때마다 집의 화단 가꾸던 일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꽃들의 소식을 전할 때마다 눈에 선합니다. 그리움도 사무칩니다.”
꽃 못지않게 김 전 대통령이 좋아했던 것은 강아지였다. 그의 세 가지 기쁨이며 벗은 ‘책과 꽃과 강아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이를 아는 지지자 한 사람이 자택에서 키울 수 있는 개를 보내주기도 했는데 한번은 김종완 전 의원이 치와와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치와와를 애지중지하며 재롱을 즐겼는데 어느 날 그가 외출한 사이에 그만 이 치와와의 다리가 부러졌다. 가끔 들러 강아지를 돌봐주곤 하던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는 김 전 대통령의 상심이 클까봐 고심 끝에 생김새가 꽤 비슷한 치와와를 구해다가 살짝 바꿔놓았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 김 전 대통령은 달리는 차 안에서도 단잠으로 피로를 풀었다. 출처=<기록 김대중 70년> | ||
측근들이 곁에서 바라본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은 한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 재임 시절 그가 자주 했던 말 중 하나는 “나는 아프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본인이 아프면 국정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므로 감기조차 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런 탓에 감기에 걸린 청와대 직원들은 대통령 가까이 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겨울이 되면 부속실과 의전비서실, 수석비서관들의 독감예방접종은 의무사항이었다.
또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신념’ 중 하나였다. 야당 총재 시절 그를 감시했던 한 형사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한번은 병실에서 총재 시절의 김 전 대통령을 감시하던 도중 감시요원에게 ‘이제부터 자신이 10분만 자고 싶은데 그동안만이라도 깨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더라는 것. 그래서 이 말을 들은 감시요원은 약간의 심술기도 발동해 좋다고 대답하고는 시계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은 반듯한 자세로 잠에 빠져 코를 골기 시작했는데 당시엔 병세도 아주 안 좋은 때여서 한번 잠에 빠지면 말과는 달리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근데 정확히 10분이 지나자 김 전 대통령은 언제 잤느냐 싶게 피로가 말끔히 가신 얼굴로 눈을 뜨고 있더라는 것.
이 인사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요원은 무척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누가 자신의 말을 그렇게 정확하게 지켜나갈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라고 털어놨다.
#요원도 반한 인간미
한번은 동교동을 감시하던 요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둘째아들 김홍업 씨가 서점에 가는 길에 따라가게 되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때 일주일 동안 읽을 노동관계 전문서적을 사러 종로에 나갔다고 한다. 불청객인 요원이 따라붙었는데도 김홍업 씨는 종로에 도착하자 “나이 드신 분을 이렇게 따라다니게 해서 제가 부담도 되고 참 어렵습니다. 어디 다방에 가서 편히 앉아 계시면 제가 책을 다 산 후 그 다방으로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그에게 말했다고. 감시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때 순진한 김홍업 씨 말에 더는 따라가겠다고 우기지 못하고 한번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30분이 지나자 김홍업 씨가 다방에 나타나 책 열두 권을 내려놓으면서 확인하기 쉽도록 산 책의 이름과 저자 등을 적은 쪽지를 건네주더라는 것.
이 요원은 “확인은커녕 종이쪽지를 건네받아 품에 넣으면서 민망해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따라 나왔다”고 털어놨다.
또 이희호 여사는 집 앞을 감시하던 이들에게 종종 커피를 끓여와 대접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여사는 “잘못이야 높은 데서 이런 일을 시킨 사람들에게 있지 공무원으로서 상사의 지시를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고 있는 당신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고 말했었다고 한다.
(참고:<이희호 자서전 동행> 이희호(웅진지식하우스), <김대중 보고서> 이열 (문화샘),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