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불도저 ‘호남 다지기’ 나서나
▲ 호남은 지금 어떨꼬…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공식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뒤 돌아서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에 3김의 정치궤도와 다른 길을 달렸던 이명박 대통령이 ‘신 정치질서 구축’이라는 역사적 명령을 부여받고 있다. 특히 그는 노 전 대통령이 그토록 되기를 바랐지만 실패했던 새 시대의 장자 역할을 해야 할 숙명적 위치에 서 있다. 청와대는 3김정치의 가장 큰 폐해가 지역주의 갈등이라고 보고 그 통합에 이 대통령이 정치생명을 걸 것이라고 단언한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펼쳐질 이명박 대통령의 신 정치질서 구축 플랜을 따라가 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서 특이한 점은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와는 달리 청와대와 김 전 대통령 간에 사전 협의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맹형규-박지원 라인’의 역할에 정치권이 주목하고 있다. 동교동계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에 대해 “맹 수석은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하자마자 곧바로 박지원 의원과 핫라인을 가동해 김 전 대통령 사후를 대비했던 것으로 안다. 그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병문안과 상도동-동교동계의 화해 이벤트도 ‘맹-박 비선라인’이 사전에 기획 조율했다고 한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화해 방문’은 차남 김현철 씨가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 과정에서 현철 씨가 청와대 정무라인의 지인들과도 사전 조율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맹-박 라인’은 그 뒤 국장 여부와 장례절차 등을 결정할 때도 어김없이 작동했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민주당을 출입하는 한 일간지 기자는 “이번 병문안 정국 및 서거정국은 맹-박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까지 말한다. 여의도의 또 다른 한 관계자는 이런 주장에 대해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 때 크게 데인 맹 수석은 이번 김 전 대통령 서거 때 당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동교동’과의 막후 채널 오픈을 필수적으로 보았다. 박 의원으로서도 자신이 청와대와의 막후 채널 주인공이 되면 정치적 웨이트를 한껏 올릴 수 있다. 특히 김 전 대통령 사후 ‘적자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 정세균 대표 입장에서는 이번 서거정국에서 박 의원에게 그 주도권을 완전히 뺏기고 뒷전으로 밀려나 스타일을 구겼지 않았는가. 이런 점에서 이번 서거정국의 최대 수혜자는 박지원 의원과 국회로 김 전 대통령 시신을 모셔와 정치의 중심에 선 김형오 국회의장이라는 말도 나온다. 맹 수석 또한 김 전 대통령 서거정국을 잘 마무리하면 정무수석 잔류 또는 입각의 영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청와대가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대비해 ‘맹-박 라인’을 가동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 급서에 대한 대응 미비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향후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2기 운영과 연동시켜 지역주의 극복과 사회통합으로 승화시키자는 ‘원려’도 동교동과의 협의 체제 구축을 가능하게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실 청와대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정국 대응책을 준비하면서 이를 전직 대통령 장례준비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3김 퇴장’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부각, 새로운 정치질서 구축을 위한 기회로 이용하자는 의견이 많이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정치권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김 전 대통령 서거 정국 대응책을 토론하면서 역대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도 적극 모색하고 있다”라고 얘기한다. 청와대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서거 이후 정국 상황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 논의의 틀을 김 전 대통령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의 재평가로 확대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것이다. 특히 청와대 정무라인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뒤 그 죽음의 의미를 두고 보수·진보 진영이 극단적으로 이념 분쟁을 일으킨 전철을 이번에는 밟지 말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한다.
이러한 공감대는 이 대통령에게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신 정치질서 구축의 토대를 마련해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청와대는 그 신 정치질서 실현의 핵심 과제를 지역주의 극복과 사회통합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것의 성패는 바로 ‘호남 민심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정무라인과 여의도의 전략 관계자들은 이 대통령이 앞으로 호남 민심 잡기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먼저 호남 민심 잡기는 신 정치질서 구축의 핵심 선결 과제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호남은 민주주의에 대한 성숙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호남은 이제 ‘포스트 김대중’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민주당의 차기 주자가 ‘포스트 김대중’ 주자로 나설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현 야당의 정체성과 투쟁방식에 실망하고 있는 민심이 전향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구제 개편을 적극 추진하는 것도 바로 포스트 김대중 이후 권력공백 상태에 놓인 호남에 차기, 차차기를 겨냥한 베이스캠프를 만드는 데 있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되는 호남 민심잡기에 이명박 정권이 진정성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새로운 정치질서 구축의 단초를 잡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한 인터뷰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집권에 대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던 것은 정권을 다시 창출하고자 하는 것인 만큼 하나의 구호였을 뿐”이라고 말한 대목도 이명박 정권의 ‘김대중 재평가’를 주목케 하는 이유가 된다. 이는 이 대통령과 수시로 통화하는 ‘실세’ 이 전 최고가 향후 김 전 대통령의 업적 재평가 과정에서 현 정권에 운신의 폭을 넓혀주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발언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명박 정권은 ‘김대중’이라는 희망을 잃은 호남 민심을 적극적으로 위무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적극적인 민심 수습책을 내놓을 전망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결 작업은 바로 탕평 인사와 대형 국책사업 유치와 같은 구체적 위무책으로 나타날 수 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이명박 정권은 출범 초기 ‘대구-포항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사 편중이 심했다. 지금도 핵심 요직은 PK(부산·경남)도 아니고 대구·포항을 중심으로 하는 성골 TK(대구·경북)가 독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반적 반성과 호남 출신 중용 없이는 그곳 민심을 잡을 수 없다. 또한 최근 결정된 대형 국책사업이 대부분 수도권과 영남에 편중된 것도 문제다. 첨단의료복합단지는 애초 대구로 결정됐지만 하도 정권 유착설 등의 말이 나와 구색 맞추기로 오송도 마지못해 선정됐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의료복합단지 조성은 그 첨단적 이점 때문에 발전 정도에 따라 향후 100년 먹을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대형 국책사업이다. 하지만 호남의 경우 전북의 새만금 개발 사업 외에 이렇다 할 대형 사업이 없다. 이런 점도 시정이 돼야 호남 민심이 현 정권의 지역주의 극복에 대한 진정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이 대통령의 신 정치질서 구축에 대한 성패와도 직결되는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신 정치질서 구축을 위해 호남 민심 잡기 플랜을 가동시키는 것은 사회통합 차원에서 미래지향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먼저 대화 카운터파트인 민주당의 상황이 복잡하다. 정세균 대표는 서거정국에서 완전히 밀려난 모양새다. 이를 두고 민주당 일각에선 ‘정 대표가 아직 참모 스타일을 못 벗어난 것 같다. 강한 야당 지도자의 이미지를 보여줘야 한다’라고 주문한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정 대표도 장외투쟁에 중점을 두고 강경 일변도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이 대통령과 신 정치질서 구축을 위한 손을 선뜻 잡을지 의문이다.
또한 선거구제 논의가 중·대선거구제 개편으로 이어질 경우 영남 텃밭에서 안주해온 친박그룹의 대대적인 반발도 예상된다. 여기에 김 전 대통령 국장 결정 과정에서 드러난 보수층 일각의 비판도 이 대통령에게는 부담이다. 호남 민심 수습을 위한 외연 확대가 자칫 ‘집토끼’의 대거 이탈로 이어지면서 확실한 지지 기반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3김의 완전한 퇴장’이라는 역사적 맥락에 대해 깊이 고뇌하고 있다면, 신 정치질서를 만들기 위한 희생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