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미 맞춰보자며 대뜸 바지 내려” 리얼한 폭로 줄이어
스티븐 시갈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일본에 합기도 도장을 연 최초의 외국인인 그는 이후 할리우드에서 스턴트맨과 무술감독이 되었다.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 <007 뷰 투 어 킬>(1985) 등에 참여한 그는 배우가 됐고 곧 액션 스타로 인기를 모았으며 제작자로서 업계 거물 중 하나가 됐다.
1990년대 할리우드 대표 액션스타였던 스티븐 시갈이 오디션을 통해 여배우들을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잇따르고 있다.
기타리스트이자 가수로서 앨범을 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유럽과 미국 지역 투어를 한 뮤지션이었다. 미국과 러시아와 세르비아, 세 개의 국적을 지닌 남자. 푸틴 대통령과 친분을 과시하고, 달라이 라마의 티벳 불교를 따르는 불자인 스티븐 시갈은 17세기 고승의 환생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는 환경 보호와 동물권 보호 운동에도 적극적이며, 사업가로서 건강 음료와 남성 화장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루이지애나 보안관을 보좌하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시갈로지’(Seagalogy), 즉 ‘스티븐 시갈에 대한 학문’이라는 단어까지 생길 정도였다. 스티븐 시갈은 기인이자, 엄청난 오지랖을 지닌 셀러브리티였다.
하지만 이 불가사의한 인물이 최근 주목을 받은 건 다소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이다. 하비 와인스틴 사건 이후 수많은 고발이 이어졌을 때, 그의 이름도 언급되었던 것.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여배우 포르티아 드 로시였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드 로시는 <스크림 2>(1997)의 머피 역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미드 <앨리의 사랑 만들기>(1998~2002)와 코미디 시리즈 <어레스티드 디벨로프먼트>(2003~)로 인기를 끈 연기자.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했고, TV 쇼 진행자인 엘렌 드제너러스와 2008년 동성 결혼을 해 화제를 끌기도 했다.
그녀는 신인 시절 스티븐 시갈의 영화 오디션 때 일어난 일을 털어놓았다. 언제 일어난 일이며 어떤 영화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시갈과의 단독 오디션 때 이런 일을 겪었다. 시갈은 드 로시에게 “촬영장 밖에서도 우린 케미를 이뤄야 한다”며 갑자기 바지를 내리고 자신의 물건을 드러냈다는 것. 드 로시는 시갈의 사무실을 뛰쳐나왔고, 이 일은 그녀에게 긴 시간 동안 트라우마였다. 그녀가 이 일을 트위터에 올렸고, 7500만 팔로어를 거느린 반려자 드제너러스가 리트윗을 하자 일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스티븐 시갈 성추행 폭로에 물꼬를 튼 여배우 포르티아 데 로시.
시갈의 반응은 묵묵부답이었지만 고발자는 계속 이어졌다. 대부분 오디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TV 시리즈 <굿 와이프>(2009~2016)의 타이틀 롤인 줄리아나 마굴리스도 오디션 때 당한 일을 털어놓았고, 모델인 제니 맥카시의 증언은 더 구체적이었다. <플레이보이>에서 ‘올해의 플레이메이트’로 선정했던 섹시 스타인 맥카시는 <언더 씨즈 2>(1995) 오디션에 지원했다. 마지막 지원자였던 그녀는 시갈 앞에 섰을 때 황당한 말을 들었다. 시갈은 영화 속에 누드 장면이 있다며, 자기 앞에서 옷을 벗어 보라고 요구했던 것. 맥카시는 오디션 용 대본 어디에도 누드에 대한 부분은 없다고 항변했지만, 시갈은 강제로라도 벗길 기세였다.
맥카시는 “내 알몸을 보고 싶으면 플레이보이 잡지를 사라”고 소리친 뒤 울면서 뛰쳐나왔는데, 놀랍게도 시갈은 주차장까지 따라 왔다. 그리곤 맥카시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그 누구에도 발설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맥카시가 이 일을 털어놓기까지 20년 이상 걸린 셈이다.
거의 묻혀 있던 일들도 되살아나 부각되었다. 사실 시갈은 1990년대 초부터 몇몇 트러블을 일으켰다. <복수무정 2>(1991)를 촬영하던 시기, 그는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의 여직원 세 명에게 동시에 고소를 당한다. 성추행 혐의였고, 시갈은 1인당 5만 달러씩 합의금을 주면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오디션 과정에서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네 명의 신인 여배우들에게 역시 고소를 당한다. 그들은 모두 밤늦은 시간 홀로 오디션을 위해 시갈을 만났고, 시갈은 그들에게 오디션과 무관한 성적 행동을 저질렀다. 역시 그들과도 합의했다.
<죽음의 땅>(1994)을 찍던 시기엔 셀러브리티를 대상으로 선글라스나 안경을 공급했던 셰릴 슈먼이라는 여성과 잠시 사귀고 있었는데, 슈먼은 시갈이 자신을 상습적으로 구타했다며 고소했다. 이 시기 시갈은 모델이자 배우인 켈리 르브록과 부부였는데, 불륜과 폭행을 동시에 저질렀던 것. 시갈은 슈먼에게 혼외 관계를 절대 알리지 말라며 협박했는데, 이 과정에도 폭력이 수반되었다는 게 슈먼의 주장이었다. 그녀의 주장은 결국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시갈의 명성에 큰 흠을 준 사건이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갈은 르브록과 이혼하게 된다.
케이든 구엔은 2010년에 100만 달러짜리 소송을 걸기도 했다. 비서였던 그녀는 시갈이 자신을 섹스 토이처럼 대했다고 주장했다. 시갈은 러시아 모델들을 데려다 섹스 파티를 벌이곤 했는데 이때 구엔에게도 함께 즐기자고 제안했고, 결국 구엔은 비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는 것이다. 시갈의 변호사는 “단 하나의 진실도 없는 완벽한 조작”이라며 맞섰고, 이후 구엔은 소송을 취하했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1990년대 액션 스타였던 스티븐 시갈. 하지만 그의 선 굵은 이미지 뒤엔, 오디션을 이용한 파렴치한 성 범죄자의 실체가 있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