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을 관람한 정청래 전 의원
정 전 의원은 1월 8일 “영화 1987은 나에게 무엇인가?-첫 번째 이야기”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청래당 당원들 40명과 함께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에서 영화 1987을 단체관람했다. 1987년 나는 이곳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도 최루탄을 맞으며 뛴 적이 있다”며 “거리는 그대로이나 극장은 주인이 바뀌고 ‘피카디리 CGV’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라고 운을 띄웠다.
정 전 의원은 “영화는 1987년 대학 3학년생 정청래가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운동권 학생으로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항거하며 학내에서 명동에서 외쳤던 구호가 고스란히 귓가를 때렸다”고 밝혔다.
이어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구호는 87년 새해 벽두 6월 항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박종철 고문살인 전두한 정권 몰아내자’로 이어졌다. 87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학내에는 전두한 살인정권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곳곳에 붙었고 학교는 을씨년스러웠다”고 강조했다.
정 전 의원은 “그러던 중 충격적인 소식이 뉴스를 탔다. 박종철 열사는 경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했고 더 충격적인 것은 고문살인이 은폐조작 됐다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국의 분노의 함성으로 들끓었고 대학가는 더 피가 끌었다. 내 심장도 뛰었다”며 “전국의 대학가 총학생회장들은 6월 10일 총궐기를 알리기 위해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학교는 술렁였다. 내 기억으로는 6월 7일부터 본격적인 집회가 시작되고 학내 시위는 점점 인원이 더 불어나고 있었다”고 전했다.
정 전 의원은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민정당에서는 체육관에서 전두환 후계자로 노태우가 선택되었고 전 국민은 4.13 호헌조치를 거부하고 직선제 개헌쟁취 국민운동 본부를 꾸렸다”며 “국본을 지휘부로 6시 일제히 자동차 경적을 울리며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쟁취”로 구호가 통일되었다.
이어 “6월 10일 건국대 서울캠퍼스 학생 1만 2000명중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진출한 학생수가 무려 6000여 명이었다”며 “평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가두투쟁이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몰려가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첫 집결지 명동에서 구호를 외치고 신세계 백화점 앞을 지나 남대문으로 서울역으로 그리고 종로에서 나는 하루 투쟁일정을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정 전 의원은 “어찌나 최루탄을 쏴대던지 옴 몸이 매캐한 최루가스를 범벅이 되어 버스를 탔다. 버스안에서도 승객들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시내로 진출했다. 끝까지 투쟁하자고 매일 귀갓길에 다짐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6월 26일. 전국 최루탄 추방대회의 날. 나는 평소처럼 두 주목 불끈되고 명동에서부터 투쟁 일정을 소화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나 카톡이 없다보니 누가 나서서 ‘학우여 종로로 갑시다’라고 하면 종로로 움직이는 거였다”며 “명동 투쟁이 끝나고 어디론가 가기 위해 길을 가고 있었다”고 밝혔다.
정 전 의원은 “수백명 수천명이 우르르 움직이는 것이 참 장관이었다. 이 날도 나는 명동에서 시청쪽으로 군중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며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경찰은 갑자기 달려들어 나만 낚아채서 닭장차 안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닭장차 출입문부터 뒤쪽까지 질질 끌려가면서 엄청 두들겨 맞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같은 또래의 전투경찰들도 흥분해서 버스 천장 윗쪽 손잡이를 잡고 구둣발로 나의 머리통 등짝을 짓밟고 짓이겼다”며 “욕설과 폭행이 계속되면서 나는 버스 뒤쪽으로 짐짝처럼 구겨져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주먹질 발길질로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고개를 숙인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정 전 의원은 “미란다 원칙을 고지도 하지 않은 채 신분만 확인하고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집시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했다”며 “그도 그럴 것이 잡혀온 사람이 워낙 많아서 제대로 조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나는 중부경찰서 유치장 구로경찰서 유치장을 전전하다가 서초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 5일을 선고받고 첫 구금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정 전 의원은 “아침에 유치장 경찰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더니 TV를 켜고 정부 중대발표를 보라고 했다. 소위 노태우의 6.29 선언이었다”며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고 김대중을 사면복권하겠으며.... 경찰서 유치장에서 6.29 선언을 보며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이틀을 더 살고 석방되었다. 경찰서를 빠져 나오는데 여느 때와 달리 서울 공기가 참 맑았다.”고 덧붙였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