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경영’에서 ‘부부경영’으로…
지난 연말 이뤄진 현대차그룹 정기 임원인사가 있기 전, 현대차그룹은 정태영 부회장의 부인이자 정몽구 회장의 둘째딸인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을 현대커머셜의 커머셜부문장, 현대카드 브랜드부문장, 현대캐피탈 브랜드부문장으로 임명했다. 세 회사의 부문장은 남편인 정태영 대표이사 부회장 바로 아래 직급이다.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현대커머셜은 정 부문장의 경영 일선 참여는 부문별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회사 관계자는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은 지난해 5월 각 사업부문의 전문성과 책임경영을 강화하고자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진행했다”며 “정 부문장 선임 역시 당시에 하지 못했던 커머셜 조직 개편의 연장선으로 기업금융과 산업금융 등 해당 업무의 책임경영을 강화해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권은 오랜 세월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던 정 부문장이 전격적으로 핵심 보직을 맡은 것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정 부문장은 2007년부터 현대커머셜의 상근 고문으로 활동했다. 현대카드·캐피탈에서는 비상근 고문을 맡으면서 그동안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었다.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의 경영은 정태영 부회장의 몫으로 인식돼 왔고,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이끌며 경영능력을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현대카드와 캐피탈은 현대차그룹 소속이고, 대주주는 현대차와 부인 정명이 부문장이다. 정 부문장은 현대커머셜 지분 33.33%를 소유, 현대차에 이어 현대커머셜 2대 주주다. 정태영 부회장의 지분은 16.67%에 불과하다. 현대커머셜은 현대카드 지분 24.54%와 현대라이프 지분 20.37%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이번 인사에서 정 부문장이 맡은 직책들을 봐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우선 현대카드 커머셜부문장은 정 부회장 바로 아래 직급이며, 커머셜본부장(사내이사), 코퍼레이터센터 부문장(부사장), 전략기획본부장(부사장) 등을 거느리는 위치다. 사실상 사장의 역할을 맡은 셈이다.
정명이 현대커머셜 부문장. 사진=현대카드
정명이 부문장이 사실상 경영 전면에 등장하면서 금융권의 관심은 정태영 부회장의 입지에 쏠린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정태영 부회장의 양재동 이동설이 떠돌아 초미의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풍문의 핵심은 정 부회장이 금융사 경영에서 손을 떼고 양재동 현대차 본사에 입성해 다른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현대차 측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지만, 카드사 경영을 맡기 전 정 부회장이 걸었던 길을 되돌아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 금융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정태영 부회장은 정경진 종로학원 설립자의 장남으로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MIT대학원 경영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85년 정명이 부문장과 결혼했고, 1987년 현대종합상사 기획실에 입사해 현대맨이 됐다. 이후 현대모비스의 전신인 현대정공 도쿄지사담당, 미주·멕시코법인장을 지냈다. 미주·멕시코법인 운영 당시 사상 첫 흑자전환을 이끌어 내며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현대모비스, 기아자동차 등을 오가며 활약하다 2003년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부사장으로 선임돼 금융인으로 거듭났다. 금융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다른 계열사에 근무한 기간이 더 길다.
현대카드의 실적이 예전만 못하다는 점도 그의 향후 행보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그가 경영을 맡은 뒤 돌풍을 일으키며 일약 업계 3위로 뛰어올랐던 현대카드는 최근 신한카드와 KB카드에 밀려 이용 실적 점유율 3위 자리까지 위협받는 상황이다. BC카드를 제외한 7개 전업카드사의 신용카드 이용실적(신용판매·금융)에서 현대카드의 점유율은 2016년 1분기 15.11%에서 2017년 1분기에는 14.86%로 1년 새 0.25%포인트 줄었다. 같은 기간 4위였던 KB국민카드는 13.44%에서 14.09%로 0.65%포인트 늘어났다.
가맹점 수수료 인하로 실적에 비상이 걸린 경쟁 카드사들이 할부금융을 잇달아 확대하면서 현대캐피탈 역시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현대캐피탈의 현대차 할부금융 점유율은 2016년 말 69%에서 2017년 3월 말 57%로 급감했다. 여기에 미국 시장에서도 대규모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진다.
2012년 야심차게 인수했지만 아직 단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현대라이프생명도 부담이 되고 있다. 누적적자가 2000억 원을 넘고 있는 데다 2021년 국제회계기준 IFRS17 도입을 앞두고 1조 원 규모의 자본 확충도 필요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현대라이프는 지난해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으며, 직원의 3분의 1가량이 퇴직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진다.
금융권 다른 고위 관계자는 “최근 딸들이 경영에 적극 참여하는 추세이니만큼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면서도 “다만 정태영 부회장의 입지나 향후 행보와 관련해 금융권의 관심이 매우 높은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