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민주화 열사 유가족들 1-‘르포’ 유가협 한울삶에서 만난 어머니들
왼쪽부터 안치웅 열사 어머니 배옥심 여사, 강민호 열사 어머니 김혜수 여사, 김윤기 열사 어머니 정정원 여사. 최준필 기자
“여기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을지 몰라…”
옆에 있던 어머니들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분은 먼 곳을 응시하면서 가슴을 내리쳤고 또 다른 분은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시 종로구 창신 2동에 위치한 한울삶.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이 터를 잡은 곳이다. 한울삶은 ‘한이 많은 사람들이 한 울타리에서 산다’는 뜻을 가졌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는 “우린 유가협이 없었으면 죽었어요.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게 인식 되고…여긴 아픔의 장소였어요. 여기가 있어서 살 수 있었어요. 트라우마 센터 1호가 아닌가 싶어요”라고 소개했다.
서울 종로구 창신2길 12-8 한울삶에서 사단법인 전국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최준필 기자
유가협 사무실 벽면엔 105명 열사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김혜수 여사는 한참을 아들인 강민호 열사의 사진을 쳐다봤다. 강민호 열사는 1966년생으로 한신대학교 경영학과 재학 중 1986년 건국대 애학투련사건으로 구속됐다. 1987년 구로구청 부정개표 사건에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남아 투쟁했다. 1988년 특별사면 된 뒤로 졸업장을 거부한 뒤 1990년 3월 대붕전선에 입사해 일주일 째 되던 날 야간작업 중 기계에 휘말려 운명했다.
김 여사는 “단 한 달만이라도 (공장을) 다녔으면 원통함이 없어요. 회사 동료도 제대로 못 사귀고…일주일동안 뭐를 했겠어요. 주말 빼면 일주일도 안 돼요. 게다가 회사가 2000년에 부도가 났어. 꿈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가버렸어요”라며 울먹였다.
김윤기 열사도 노동 운동에 앞장섰다. 1964년생인 김윤기 열사는 국민대학교 무역학과 재학 중 5․3 인천투쟁에 참가해 구속됐다. 이후 봉제 공장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출 돼 회사 측과 교섭에 들어갔다. 하지만 회사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협상은 계속 결렬됐고, 결국 신나를 끼얹고 항의 분신했다.
김윤기 열사의 어머니인 정정원 여사는 “아들 몸에서 최루탄 냄새가 났다. 그래서 ‘네가 맏이인데 데모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성격 좋은 아들은 어깨를 주무르며 ‘모두가 잘 살기 위해 하는 것이에요. 참으세요. 어머니’라고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정 여사는 “김윤기, 아주 독한 놈이야. 우린 애들 보내고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저렇게 가버려…”라며 눈물을 보였다. 김윤기 열사를 보낸 뒤 정 여사는 수 년여를 울면서 살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주위에서 ‘울보 엄마 왔다’고 할 정도였다. 정 여사는 “형편이 어려워 맛있는 것도 못 먹이고 변변한 구두 한 켤레 못 사줬어요”라면서 “아들을 위해 해준 게 아무 것도 없어. 억울하고 세월이 허무해요”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끝내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모르는 아들도 있다. 안치웅 열사는 민주화추진위원회 핵심 활동가로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지원하다 구속됐다. 만기 출소한 안치웅 열사는 공안 기관의 지속적인 감시 중 1988년 5월 “목사님을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행방불명됐다.
안치웅 열사의 어머니인 백옥심 여사는 “차라리 ‘깃발 사건(서울대학교 학생 운동 비공개 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이적 단체로 규정해 관련자 26명을 구속한 사건)’으로 구속됐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만만하게 보인 것 같아요. 당시에 강남에서 ‘광주 식당’을 했는데 오가던 사람들한테 ‘빨갱이’로 몰렸어요”라며 울먹거렸다. 결국 안치웅 열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옆에 있던 배 여사가 “먼 훗날 올거야. 우린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라며 백 여사를 위로했다.
백발이 된 김용권 열사의 어머니 박명성 여사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1964년생 김용권 열사는 카투사로 입대해 1986년 서울대 민민투와 관련된 제보를 하라고 강요받았다. 김용권 열사는 알몸 상태로 구타를 당하는 등 고초를 당해 불면증과 신경쇠약, 정신불안 등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후 김용권 열사는 1987년 2월 내무반 2층 침대 난간에서 목을 매고 죽은 채 발견됐다. 부대 측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점, 무릎을 꿇어야할 정도로 낮은 난간에 목을 매어서는 질식사할 수 없다는 점, 사건 당일의 행적이 불분명한 점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타살임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채 의문사로 남고 말았다.
박 여사는 “유공자 법도 안 되고…아직 할 일이 많아요. 진상은 꼭 밝혀져야 해요”라며 아들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열거했다. “김성수는 부산 앞바다에 버려지고 이철규는 저수지에 빠트리고 박종철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우리 아들들을 모두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왼쪽부터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 강민호 열사 어머니 김혜수 여사, 김윤기 열사 어머니 정정원 여사, 김용권 열사 어머니 박명성 여사, 안치웅 열사 어머니 배옥심 여사. 최준필 기자
어머니들은 아들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남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일은 다름아닌 아들들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민주화 운동 사망자 136명, 상의자 800여 명, 해직이나 학사 징계 등 피해본 자가 8000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사망자와 상의자만 유공자로 인정을 해달라고 해도 10년 째 법안이 상정됐다 폐기되고…이 과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배 여사는 “우리끼린 ‘열사’라고 안 불러요. 국가적인 차원에서 먼저 이름을 만들어줘야 당연한 처사”라며 벽면에 있는 열사들의 사진을 가리켰다. 이어 “군사 정권에서 직선제를 만들어 낸 게 이들의 죽음이었습니다. 민주화 과정에 이바지해서 죽은 이들에게 ‘민주 열사’를 부여해 달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박 여사 또한 “우리 아들들은 ‘빨갱이’가 아닙니다. 명예 회복을 해줘야 합니다. 또한 배상도 보상도 아닌 ‘가족위로금’을 받았으면 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고, 청와대 대들보 같은 애들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한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어느 날 ‘이런 걸 너네가 왜 하냐’고 물으니 ‘어머니, 노동자는 처자식이 있고 군인은 복종해야 하고, 결국 학생들이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그 시대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화 투쟁 운동) 안 한 사람들 잘 살고 있어. 운동권 중에서도 줄 잘 선 사람들 잘 살고 있고. 원통할 뿐이야…”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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