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민주화 열사 유가족들 2-‘인터뷰’ 고 전태일 열사 여동생 전순옥 전 의원
최준필 기자=9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청계천로 433 소상공인연구원에서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자 소상공인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전순옥 전 의원 인터뷰.
―고 전태일 열사만큼이나 아들을 먼저 보내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도 특별한 분이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참 말씀도 잘 하시고 재밌는 분이셨다. 평소에도 어른은 물론 아이들과도 두루두루 소통하셨다. 주말에 우리가 가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집을 찾아와 놀다 가곤했다. 엄마가 2011년 돌아가셨을 때 많은 어린 아이들이 찾아와 깜짝 놀랐다. 그 부모께 물어보니, ‘내가 아이들을 데려온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데려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전태일 열사 책을 읽고 이소선 여사를 만난 연으로 직접 가자고 했다’고 하더라. 그렇게 소통을 많이 하셨더라. 나도 깜짝 놀랐다.”
―어려서부터 가족이 더부살이를 할 만큼 어렵게 지냈다.
“우린 가난했지만 마음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엄마는 우리들에게 어려서 부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가난은 힘들었지만, 우린 어린 시절 재밌었다. 어쩌면 그렇게 큰일을 당하시고 버티셨던 것이 그러한 긍정적인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후에는 신앙심도 가지셨고.”
―고 이소선 여사의 부친도 힘들게 돌아가셨다. 정말 피는 못 속이는 듯하다.
“그렇다. 외할아버지께서도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끝내 순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오빠가 돌아가셨을 때 가족들의 충격이 컸을 텐데...더군다나 본인은 16살이었다.
“물론 충격이 컸다. 태일 오빠는 엄하기도 했지만, 평소 읽은 책을 내게 들려주기도 하고 또 잘 챙겨줬다. 오빠가 죽었을 때 기관에서 돈 뭉치를 들고 장례를 지내자고 왔다. 그 때 엄마가 우리에게 물었다. ‘돈을 받으면 너는 학교에도 갈 수 있고 우린 먹고 사는데 지장 없지만, 오빠의 뜻은 이루기 어렵다. 반대로 이 돈을 안 받으면 너는 당장 공장에 다녀야 하지만, 오빠의 뜻은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2010년 전태일 열사 추모 40주기 당시 고 이소선 여사.
“오빠의 뜻을 이루자고 했고, 결국 난 스스로 16살 때 공장에 취업했다. 그렇게 여공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친동생이란 낙인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평화시장이 아닌 부평공장에 취업했다. 처음엔 취업한 회사에서 내가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줄은 몰랐다. 그런데 사측이 임금 지급을 자주 미뤘고, 우리 여공들은 파업에 나섰다. 이전부터 그 회사는 식사와 처우가 형편 없었다. 결국 사측이 내 신분을 알았고, 난 쫓겨났다. 이후에도 몇몇 공장을 전전했지만, 해고의 연속이었다. 1975년부터는 결국 취업이 어려워져, 집에서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
―정권의 탄압, 감시도 심했을 것 같다.
“그건 부지기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1977년 엄마가 투옥됐을 때는 매일 아침 제일 먼저 면회하는 게 일이었다. 정보과 형사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친구 집 뒷 창문으로 몰래 빠져 나갔을 때는 제 담당 형사가 자기 안 혼나게 좀 부탁한다고 사정까지 하더라. 그렇게 살았다.”
―힘겨운 삶이었는데, 오빠나 엄마에 대한 후회나 원망은 없었나.
“그건 내가 직접 결정한 삶이다. 16살 때 내가 결정한 거다. 그러니 원망은 없었다. 전태일의 여동생, 이소선의 딸...이것 때문에 힘드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난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늘 답했다. 난 이게 내가 살아가는 내 길이라고 생각했다. 전순옥은 전순옥의 삶일 뿐이었다.”
―그러다 공부는 어떻게 하게 됐나.
“1988년 일본과 독일 등에서 현지 노동자들을 만났다. 노동자들 간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꼈다. 특히 독일에 갔을 때 주변에서 내게 영어를 배우라고 권했다. 1989년 독일과 영국, 한국의 카톨릭 단체들의 도움으로 영국에 갔다. 순전히 6개월간 영어를 배우려고.”
최준필 기자=전순옥 전 의원은 말한다. ”우린 혜택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다. 6개월 연수가 끝나니 나를 도와줬던 현지 친구가 사우스뱅크 폴리테크닉(현 사우스뱅크대학) 1년 코스(노동운동사)를 권해 더 공부했다. 그 친구가 일자리까지 알아봐 주더라. 그런데 그 과정이 끝나니 학교 선배가 또 옥스퍼드 러스킨 칼리지 입학을 권했다. 원래 이것도 1년 만 공부하고 귀국하려했는데 도움을 주던 독일의 장학재단에서 우연찮은 실수로 2년짜리 장학금을 내어줬다. 그 3년 과정을 거치니 내가 석사 과정을 밟을 자격이 주어졌다. 영국의 학부 과정은 3년이다. 그런데 때 마침 칼리지 과정의 심사위원이 내가 석·박사를 이수한 워릭대학의 노사관계 권위자였다. 그 교수의 권유로 결국 12년동안 공부하게 된거다.”
―우연에 우연의 연속이고, 주변의 도움이 컸다. 어머니께서도 기뻐했겠다.
“하늘의 뜻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당연히 엄마도 너무 좋아했다. 본인께선 자식들 공부 못시킨 것에 참 미안해 했었는데...”
―노동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가족을 먼저 보낸 이들 간 교류와 위로도 많은 도움이 됐나.
“물론이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것을 처음에 혼자 다 감내하셨으니...전태일 분신사건은 그러한 운동에서 첫 희생이었다. 나중에 박종만, 김진수 열사 등이 희생됐을 때 엄마가 그 가족들을 찾아갔다. 이후에도 그러한 일을 누군가 당하면 본인이 같은 일을 겪었기에 서로 위로하셨다. 그러다 고 김대중,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화 등을 모아 자금을 마련해 1986년 설립한 게 바로 지금의 유가협이다.”
―여전히 열사들의 유가족들 가운데 트라우마를 겪는 분들이 많다.
“무엇보다 사회인식 재고가 중요하다. 언제나 우리 유가족들에겐 사회와 정권이 프레임을 걸어왔다. 바로 ‘빨갱이 프레임’이다. 이제 정권이 먼저 앞서의 이러한 적폐 청산을 통해 정화를 이뤄야 한다고 본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전태일 유가족)는 그래도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엄마가 늘 그랬다. 나도 과거, 정부에 명예회복을 신청하고자 했지만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더라. ‘우리는 이미 명예회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이제 남은 분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할 때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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