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덕면 말국재 언덕에서 바라보는 해안가 비경은 그 경치에 반해 발을 헛디뎠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 ||
올 신년의 아침은 안갯속에서 밝았다. 비리정국의 뿌연 먼지 탓이었을까. 동해는 물론 전국 어디서도 땅이나 바다에 걸린 아침해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년 벽두 해돋이를 놓쳤다 해서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설이 다가오면서 오히려 아침마다 맑은 일출이 이어지고 있다. 큰 맘 먹고 일찍 일어나 동해로 가보자. 강릉 정동진이나 동해 추암 등이 일출 명소로 유명하지만 이런 곳은 초보자용. 너무 붐비거나 비좁아 해안 일출의 벅찬 감동이 너무 짧다.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삼척 울진 방향으로 내려가면 그보다 나은 해안언덕들이 즐비하다.
동해안의 설날 해뜨는 시각은 아침 7시36분. 지난해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라도 30분 남짓의 수평선 일출을 제대로 보려면 일기예보를 참조해야만 한다. 일출을 보기 위해 해안의 비싼 호텔을 잡았다가 아침에 먹구름만 보게 된다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그래서 일출사진을 찍으려는 작가들은 일기예보가 자신있게 맑다고 하는 날이라야 동해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일기예보는 참조용이다. 반드시 수평선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게 된다.
영동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동해안을 달리는 새 고속도로는 북으로 주문진, 남으로 동해시까지만 완공돼 있다. 인파가 밀리지 않는 해안은 동해시를 남쪽으로 벗어난 곳부터 시작된다. 여기가 삼척시다.
마라톤 영웅 황영조를 길러낸 삼척시 근덕면 초곡마을에서 용화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말국재 언덕길.
당초 정선에서 동해를 잇는 백복령 고갯길을 넘으면서 추암의 촛대바위 일출을 생각했고, 삼척의 새천년 도로변에 조성된 해맞이 공원도 생각했다. 하지만 조용한 해안가에서 파도소리 들으며 잠을 청하고 이른 아침 고깃배의 생동감도 맛보고 싶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근덕면 초곡리 고갯길을 넘어 남쪽으로 향한다. 초곡항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해변은 용화에 이르러 해안절벽을 만들어낸다. 내리막길을 달릴 때면 늘 차를 멈추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고갯길의 이름은 말국재다. 옛날에 사람을 태우고 가던 말들이 고개를 넘다가 그만 아름다운 해안 경치에 반해 자주 발을 헛디뎌 밑으로 구르곤 했다는 전설과 함께 전해오는 이름이다. 고갯길을 넘는 순간 나타나는 비경에 넋을 잃지 않도록 운전자들도 주의할 일이다.
주차할 곳이 있겠지 하고 잠시 망설이다 보면 어느새 용화리.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번에는 미리부터 찬찬히 포인트를 살핀다. 공인된 일출 포인트라는 건 없지만 오랜 경험으로 보건데 분명히 이 언덕 위에 차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만일 예상대로 맑은 아침이 된다면) 최고의 일출이 될 것이다.
시원하게 탁 트인 용화와 장호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은 동해안 국도변에서도 가장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겨울이어서 더 푸르게 느껴지는 옥빛 바다는 저 아래로 활처럼 이쁜 해안의 곡선을 따라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파도 친다. 저 멀리 장호항과 해안가의 기암들도 가세해 아름다운 해안을 장식하고 있다.
여름이라야 피서객을 위해 어가 민박이 문을 여는 정도라서 반듯한 숙소를 잡아야만 한다면 삼척시내쪽으로 나가야 한다. 삼척시를 우회하여 해변따라 새로 트인 새천년길 가에는 번듯하게 새로 지어놓은 호텔과 숙소들이 꽤 많다.
용화를 지나 장호항으로 발길을 돌린다. 바닷가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희뿌연 안갯속으로 식당 불빛만 새어 나고 있다. 마을안으로 들어서 바닷가 섬바위쪽으로 다가간다. 느낌이 괜찮은 못난이횟집(033-573-4303)에 자리를 잡는다.
치장하지 않은 어촌의 단층 건물. 그저 평범한 식당안에 내일 아침 해돋이를 보려고 온 손님들만 두어 팀 자리를 잡았다. 모양없이 큼지막하게 썰어낸 모둠회(4만∼5만원선)가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신선하고 맛있다.
돔이라는 귀한 생선에 식혜까지, 매운탕 국물맛도 개운하다. 식당집의 추천으로 소라민박집(033-572-4031)을 찾아들었다. 요즘은 이런 한적한 해변 민가에서도 하룻밤 5만원을 예사로 부르지만 소라집은 3만원이면 된단다.
바닷바람 탓일까, 웃풍이 다소 심하고 수건과 비누 외에는 모든 것을 준비해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의 민박집에 비하면 지금은 궁궐이나 다름 없다.
해돋이를 봐야 한다는 강박감에 새벽 3시에도 눈을 뜨고 6시께 다시 뜬다. 일출 시각까진 한 시간도 넘게 남았다. 일찍 나가자니 모자란 잠이 아깝고, 다시 잠을 청하자니 제시간에 못일어날까 겁이 난다. 그래서 일출까지 한 시간쯤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간다. 용화해변에는 용화관광랜드가 있다. 비슷한 이유로 잠을 설친 사람들인 듯,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자판기 커피로 시린 손을 녹이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말국재 언덕으로 오른다. 어찌들 알아냈을까. 몇 대의 차들이 따라와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이내 노변 여유공간은 꽤 많은 차들로 가득찬다. 마침 춥지 않은 겨울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일출 보기엔 그만인 날씨다. 멀리 장호항쪽으로 밤새 고기를 낚은 어선들이 꼬리를 물고 부산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망망대해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기대했지만 장호항 뒷산이 약간씩 붉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터운 안개가 끼어 해는 수평선에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오랜 진통 뒤 수평선으로부터 두뼘은 올라선 곳에서야 해는 힘겹게 얼굴을 내민다. 아무래도 기도가 부족했나 보다.
그 많던 사람들도 소리없이 흔적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몇 사람에게 물어보니 로또복권 당첨을 기원했다는 답이 가장 많다. 다시 갈남으로 향한다. 갈남포구에는 낚시객들만 눈에 띄고 월미도라는 섬은 그저 아침 햇살에 모양 없이 바다 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다.
▲ 갈남포구 포장마차에서 지글지글 꽁치구이 (위)가 관광객을 유혹한다. 처녀신을 위로하는 해신당에는 남근석이 열지어 있다. | ||
고깃배가 들어올 시간이라 오늘도 예외없이 어시장이 열린다. 오징어 대게 곰치 피문어와 잡어가 전부다. 오전 9시30분을 넘으면 이미 물건은 동이 난다. 이곳 고기는 질이 좋아 동해에서도 최상으로 꼽힌다고 한다. 그런 만큼 가격도 비싼 편이다.
아주 싸다는 기분으로 회를 먹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더 내려가 임원항을 찾으면 된다. 경북 울진과 맞닿은 임원항은 싱싱한 회가 가장 싸고 푸짐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임원항으로 가는 도중 갈남포구를 거친다. 처녀신을 기리는 ‘해신당’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허물어진 사당 하나 어촌 마을 뒷산에 덜렁 남아있던 곳인데, 해마다 해신당에 바치는 목각 남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비좁은 비탈길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2년 7월 마을에 어촌민속관을 세우고 나서는 마을이 술렁이는 관광지 분위기로 바뀌었다. 포장마차에서는 꽁치와 소라, 아지 등 생선 굽는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입장료 3천원을 내고 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에 사람 키의 두 배나 될 정도로 큰 남근석이 열지어 서 있다. 크고 작은 남근석을 깎아세운 테마랜드다. 바다에 빠져 죽은 처녀귀신을 달래기 위해 해마다 나무로 남근석을 만들어 주렁주렁 매달던 풍습을 테마로 꾸민 것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과 10월5일에 향나무로 깎은 남근을 바치면서 제를 올려 풍어와 안녕을 빈다. 올 대보름은 2월5일이다. 사당 문은 닫혀있다. 매달아둔 남근이 자꾸 없어지기 때문이란다. 사당안에 처녀신을 그린 듯 미인도 한 점이 걸려 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어촌민속관 엘리베이터를 기억해 두는 것도 좋고 해안가를 따라 산책을 하는 것도 괜찮다. 갈남에서 고깃배를 이용해 낚시를 하고 싶다면 김진철(017-326-4241)씨에게 문의하면 된다. 4인 기준 8만원 정도 한다.
임원항은 삼척의 남쪽 끝자락쯤에 붙어 있는 어항이다. 묵호항을 기점으로 강원도 어시장은 임원항이 끝. 삼척해변의 한적한 어촌들만 보다가 이곳에 이르면 큰 항구에 이른 기분이다. 방파제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간이횟집에서는 여러 가지 활어를 가득 담아 즉석에서 회를 쳐준다. 자연산 회나 건어물의 값이 싸기로 소문난 곳이다. 임원항 옆 7번 국도상에서는 등대 옆으로 떠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다.
동네사람에게 물어서 찾아간 곳은 일억조 회식당(033-573-9217). 겨울 별미 곰치국을 한그릇을 앞에 놓고 보니 <정라진 곰치국>이라는 월천(月川) 이성진님의 시가 생각난다.
‘파도 소리로/얼큰한 곰치국/정라진 사람들의/억양으로도/그 맛을 알 수 있다. // 아랫데 어디선가 왔다는/홀애비 김서방/굽이굽이 해안선 따라/미련을 심었던가. // 그의 가슴 속에는/늘 사나운 파도가 쳤다/그럴 때마다 짙은 욕을 했다. // 한번도 바위를 치지 않았다./그럴수록 턱엔 수염이/해초처럼 돋았다. // 물날이 셀수록/독한 소주와/얼큰한 곰치국으로 속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