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리산 넉넉한 품에 살포시 안겨있는 법주사. 아래쪽은 높이 33m에 이르는 청동미륵대불이다. | ||
신라 고찰 법주사와 함께 ‘세속과 떨어진다’는 의미의 이름을 갖고 있는 속리산을 찾아갔다. 오랜 명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명산들에 비해 크게 북적거리지 않는 속리산의 넉넉한 품이 한층 여유롭다.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정상의 암봉 문장대는 등산객들의 도전을 기다린다.
워낙 큰 절이 있는 산을 갈 때에는 산이 먼저인지 사찰이 먼저인지 우선순위를 따지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특히 그 절이 관광목적지로서도 빠질 수 없는 주요 명소일 때 사찰에서 머무는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속리산과 법주사가 그렇다. 그 유명세가 비등하여 산에 오르는 등산객만큼이나 법주사만을 찾는 사람도 많다.
속리산의 깨끗한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길, 그 첫 관문에 법주사가 위치해 있다. 법주사는 건물 하나, 돌 하나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기에 산과 더불어 자연스런 조화를 이룬다. 순한 평지에 활기찬 얼굴로 여기저기서 부처의 얼굴을 드러내는 법주사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면서 탑돌이로 유명한 팔상전을 정면에 두게 된다.
가람의 배치가 한눈에 다 보이는 이곳은 절의 중심부터 사방 구석구석이 빈 곳 없이 채워져 있어 어딘지 산만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만큼 오랜 연륜을 느끼게 된다. 깊은 산중의 사찰이 주는 고요함보다는 8층 목탑의 웅장함, 높이 33m 청동미륵불의 장엄함, 보물들의 신비로움으로 가득하여 하나하나 둘러보는데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를 모셔둔 것으로 유명하다. 낮시간 공개되어 있다가도 오후 6시가 되면 어김없이 문을 닫는다. 보물을 보셔둔 곳이기 때문이다. 팔상전을 중심으로 정면에는 공사중인 대웅보전과 원통전 등이 있고 왼쪽으로는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과 철당간, 수정암 등이 있다.
사찰 경내를 가득 메운 색색 연등이 차례차례 불을 밝히는 날. 사람들은 조용히 탑을 돌면서 소원을 빈다. 건강, 합격, 돈과 명예 등등 이루지 못한 꿈들이 줄줄이 실타래처럼 엮여 불을 밝혔다.
▲ 탑돌이로 유명한 법주사 팔상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오색연등이 걸려있다. | ||
보은에서 속리산으로 가는 7km 전방부터 ‘말티고개’라는 열두 굽이 고개길이 시작된다. 교통이 발달한 지금에야 선택적으로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드라이브 코스라고 하기엔 부담스러운 이 8백m의 꼬불꼬불한 말티재를 넘고 있다. 고개 위에 있는 간이 휴게소 아주머니 말로는 산의 뼈대를 드러내는 겨울에 이르러서야 열두 굽이를 뱀처럼 휘감아 오르는 말티고개의 참다운 전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말티재를 넘으면 이제 속리산으로 가는 길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을 만큼 편안하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곳이 ‘화개장터’라면,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곳은 속리산의 너른 품안이다. 한국 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속리산은 소백산맥 줄기에 위치하여 충북 보은군, 괴산군, 경북 상주군의 경계에 걸쳐 있다. 법주사를 중심으로 동북쪽에 천황봉을 비롯해 입석대 문장대 경업대 등 1천m가 넘는 봉우리와 계곡이 절경을 이루고 수많은 천연기념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충북 알프스’로 불리던 그 속리산(1천57m)은 한때 많은 관광 인파로 북적대던 시절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한적해진 편이지만 아직도 사철 꾸준히 관광객과 등산객, 그리고 세미나, 워크숍, 수학여행 등 단체 관람객이 끊이질 않는다.
법주사를 지나 약 1.5km 구간은 가벼운 산책 코스다. 그러다가 ‘목욕소’가 위치한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하면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숨차도록 가파른 언덕이 버티고 서서 ‘깔딱고개’라 불리던 이곳에 올라서면 길은 문장대와 천황봉으로 갈라진다. 각각의 정상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한시간, 느린 걸음으로는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천황봉으로 먼저 오르고 속리산의 최고 전망을 빨리 보고 싶은 사람은 문장대로 향한다. “문장대 세 번 오르면 불로장생한다”는 말에 갑자기 기운이 솟는다.
운 좋은 날이면, 등산 초입에서 산지산인(山之山人:산에서 사는 산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심마니길이나 아기자기한 우회길, 또는 동네 주민들만 다니는 길로 안내를 받는 것이 첫 번째 행운. 11년째 주말마다 문장대를 오르고 있다는 문장대 휴게소 주인 김덕자(45세) 씨는 “사람들이 자꾸 앞만 보고 가는 데, 그건 아니지. 여기 숲을 한번 봐. 길을 돌아봐. 얼마나 이뻐. 11년을 와도 질리지 않는 산인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 한다.
봄 가을 손님이 가장 많지만 김씨는 속리산의 겨울이 참 좋단다. 지난 폭설 때 입은 피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긴 하지만 눈 내린 속리산, 그것도 문장대에서 보는 경치가 사람의 혼을 앗아간다며 웃는다.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문장대(1천53m)는 꼭대기 너럭바위에 올라서기까지 아찔한 철계단을 몇 개나 올라가야 한다. 문장대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이 하늘이다. 모든 산맥과 모든 수풀이 바다처럼 드넓고 거대하다. 넓이를 가늠할 수 없고 깊이를 잴 수도 없다. 아찔한 두려움마저 급습한다.
불로장생이 어디서 유래된 말인지 모르지만 문장대에 서서 보는 세상은 세상 그 너머의 것이다. 문장대 바로 턱 밑까지 오르는 데 있어 위험한 요소는 한 군데도 없다. 오직 끈기와 노력만 있으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을 만날 수 있다.
▲ 문장대에 이르는 아찔한 철계단. 이곳을 세 번 오르면 불로장생한다는 전설이 있다. | ||
속리산이 있는 충북 보은군의 향토문화축제인 ‘속리축전’이 부처님 오신날을 낀 5월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간 보은읍내와 속리산 일원에서 펼쳐진다. 법주사 탑돌이나 제등행렬과 같은 전통문화행사를 비롯해 공연, 전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법주사가 있는 사내리 주변 30분 이내 거리에 속리산의 또다른 명소들이 숨어있다. 속리산 입구에서 말티고개로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505번 지방도로 이정표를 만나게 되고, 이 도로는 외속면 25번 국도와 만날 때까지 속리산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며 등산객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굽이 돌아 오르는 도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삼가저수지에 도착한다.
저수지에서 조금 더 가면 속리산 남쪽 기슭에서 흘러내린 물이 한줄기로 만나는 서원계곡을 만난다. 계곡의 물소리만큼 확트인 시야가 여간 반갑지 않다.
서원리에는 속리산 입구 정이품송의 ‘부인’으로 대접받아 온 아내 소나무가 눈에 띄는데 두 그루 모두 지난 겨울 폭설 피해로 치료를 받는 중이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5분 정도 떨어진 속리초등학교 맞은 편 작은 다리를 건너면 조선시대 아흔아홉 간 대갓집을 그대로 보존한 선병국 가옥(중요민속자료 제 134호)이 멋스런 자태를 드러낸다. 남아있는 세 채의 기와집 가운데 가장 고풍스러운 건물로 개화기에 새로운 한옥의 기법을 시도한 건축물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금은 도솔천(043-542-9933)이라는 전통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어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여행 길라잡이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청주IC, 중부고속도로 서청주 IC-청주-보은 방향 25번 국도-37번 말티고개-속리산국립공원/보은에서 속리산까지 직행버스 수시운행, 20분 소요
★ 맛집: 법주사 앞 관광지구에는 산채정식을 잘하는 집들이 워낙 많다. 산채정식이 아닌 이색 맛집으로는 ‘석쇠구이 손두부집’(543-3912)이 유명하다. 직접 개발한 솔잎두부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금은 시레기 두부찌개로 입맛을 즐겁게 한다. 경남 산청에서 가져온 단무지 시레기를 껍질을 벗기고 삶아 직접 만든 손두부와 재워둔 양념을 넣고 살짝 끓여낸다. 구수한 생콩가루를 더한 시레기 두부의 맛은 혀에 착착 감긴다.
★ 숙박: 아람호텔(543-3791∼2), 숙박업소 종합 문의(542-5281~8).
★ 문의: 속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542-52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