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 위치 악용 움켜잡고 키스하고 몸매 품평…내부 고발 이어지자 6개월간 자진휴직
‘코코’ 개봉을 앞둔 2017년 11월, 디즈니는 초비상 상태를 맞는다. 어쩌면 터질 일이 터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니메이션 파트의 수장이자 할리우드 거물 중 한 명인 존 라세터가 자진 휴직에 들어간 것. ‘토이 스토리’(1995)로 장편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장을 열었으며 픽사 스튜디오를 통해 수많은 걸작을 내놓은, 2006년 픽사가 디즈니에 합병된 후엔 디즈니에서 나오는 모든 애니메이션의 크리에이티브를 관장했던 존 라세터. 그는 월트 디즈니 이후,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포문을 연 사람은 라시다 존스였다. 전설적인 음반 제작자 퀸시 존스와 여배우 페기 립튼 사이에서 태어난 라시다 존스는 배우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었다. 그녀는 2019년 개봉 예정인 ‘토이 스토리 4’의 작가 중 한 명이었는데 프로젝트에서 빠지면서 그 이유에 대해 11월 21일 ‘뉴욕타임스’에서 밝혔다. “그만둔 이유는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더 중요한 건 철학적 견해에 대한 차이 때문”이라고 말한 존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픽사에선 여성이나 유색 인종은 동등한 발언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나는 픽사가 좀 더 다양성을 추구하고, 특히 여성 시나리오 작가와 업계 리더를 키워내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다.”
수많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지녀왔던 픽사 스튜디오에 대한 이런 비판은 대중에겐 다소 낯설었다. 대부분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들을 만들어 왔던 픽사 내부에 이런 차별이 존재해왔다는 건 다소 충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존스의 폭로는 사실 폭로 축에도 못 드는 발언이었다. 내부 고발자들에 의해 쏟아지기 시작한 존 라세터의 오랜 만행은 상상 이상의 더러움이었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애니메이션 업계 특유의 네트워크 때문에 모든 고발은 익명으로 이뤄졌다. 그중 한 명은 픽사에 긴 세월 동안 근무했던 스태프였는데, “움켜잡고, 키스하고, 몸매에 대해 품평하기”로 라세터의 성추행을 요약했다. 라세터는 시사회가 끝난 후 파티에서 엄청나게 과음하는 걸로 유명했고 취중에 이런 행동이 종종 이뤄지긴 했지만, 멀쩡한 대낮의 업무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추잡한 행동은 삶 속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일상화된 패턴이었다.
특히 그는 보스의 위치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친근함을 가장해 허그와 가벼운 키스를 수시로 했는데, 몇몇 여성 직원들은 원치 않은 스킨십을 피하기 위해 길을 가다 멀리서 라세터가 보이면 슬쩍 다른 길로 빠져나갔다. 길이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영락없이 뺨이나 입술을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라세터는 페티시 성향이 있는지 여성의 다리에 집착하곤 했는데, 픽사 여직원들 사이엔 라세터가 다리를 못 만지게 하는 동작을 일컫는 ‘더 라세터’(the Lasseter)라는 은어가 있을 정도였다. 어느 직원은 회의 시간에 목격했던 일을 털어놓았는데, 라세터 옆에 앉은 여직원은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는 것. 이른바 ‘더 라세터’로, 무릎을 어루만지는 라세터의 손이 그 위로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자세였다.
라세터의 손버릇은 요란하기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어떤 직원의 말에 의하면, 동료의 방에서 이상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는 것. 회사 행사 때 찍은 사진인데 라세터는 두 여성 사이에 앉아 있었고, 사진은 이상한 형태로 잘려 있었다. 두 여성 중 한 명이 동료였는데, 사진을 왜 이렇게 잘랐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잘라낼 수밖에 없었어. 라세터가 어디에 손은 얹고 있었는지 알아?” 한편 허그를 할 경우 긴 시간 동안 껴안은 상태에서 상대 여성의 귓가에 대고 계속 이상한 말을 속삭였다.
이런 추문이 폭로되자 존 라세터는 곧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항상 우리의 스튜디오가 크리에이터들이, 재능 있는 애니메이터와 스토리텔러의 도움과 협조로 각자의 비전을 탐구하는 곳이 되길 바랐다”는 말로 시작하는 글에서 라세터는 “실수를 직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행동이 범죄가 아닌 단순한 순간적 일탈이라는 걸 강조했다. 그러면서 친절한 의도에서 비롯된 자신의 스킨십에 불쾌함을 느꼈다면 사과한다고, 디즈니와의 협의 끝에 잠시 현업에서 물러나 있겠다고 밝혔다. 이후 6개월의 자진 휴직에 들어갔다.
저지른 짓에 비해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자 픽사 직원들과 관련자들은 “심각한 짓을 저지른 후 그걸 사소하다고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짓”이라고 반응했다. 그리고 한 직원은 “단지 원치 않은 허그를 한 게 잘못이라면 그가 휴직을 할 이유는 없다”며 라세터가 그 이상의 짓도 서슴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디즈니 스튜디오는 “모든 직원들이 존경 받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환경”이 당면 과제라는 코멘트를 했다. 이후 라세터가 디즈니에 복직할 수 있을지, 그의 휴직이 6개월 이후로 연장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