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나를 버리고 여러분 갈 길 가야…”
▲ 마지막 하고 싶었던 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회고록 <성공과 좌절>(학고재)에는 비공개 인터뷰 미완성 원고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 ||
서거일 직전에 쓴 글에는 노 전 대통령의 절절한 괴로움이 녹아 있으며, 비공개로 올린 글 속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김영삼 전 대통령(YS) 등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담겨 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이 회고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주변 정치인들에 대한 단상도 함께 들어 있다. 책 속의 몇몇 내용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의 눈에 비친 정치사건 및 거물 정객들의 모습과, 바로 그 정객들이 자신의 책 등에서 당시 상황이나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평한 내용들을 비교해 짚어봤다.
# DJ와 YS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국보급 대접을 받을 만한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그런가 하면 과거의 한 인터뷰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역사적 안목에 대해 “천재적”이라고 말했을 정도.
두 사람이 가까이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그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맹공을 펼친 5공 청문회 때였다고 한다. 국회 본청 의원식당에서 처음 그를 마주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잘했어요. 잘했어요”라며 칭찬을 건넸다고. 당시 민주당과 사이가 좋지 않던 평민당 총재인 김 전 대통령이 민주당 초선인 자신에게 칭찬을 건넨 것에 노 전 대통령은 의구심도 없지 않았지만 “DJ의 표정은 정말 후배를 격려하는 어른의 자상한 모습 그대로였다”고 회상했다. 노 전 대통령은 과거에 쓴 책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나는 YS를 ‘탁월한 정치인’으로 평가하면서도 그를 ‘지도자’로 인정한 일은 없다. 그러나 DJ에 대해서는 ‘지도자’로 이름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래 전에 역사의 인물이 된 김구 선생을 제외하고는 역대 대통령이나 현존하는 정치인 중에서 내 마음 속으로 지도자로 생각해 본 사람이 없고 보면 나로서는 그분을 특별히 존경하는 셈”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독서력에 대해 한 일화를 들기도 했다. “얼마 전에 세종대왕의 리더십에 대한 책을 보니 저자가 ‘세종대왕은 책을 많이 보았는데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 계실 때에는 지금의 방 하나가 완전히 서고였다.”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1987년 이전까지의 정치적 업적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못지않다”며 “다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해 독재 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고초를 덜 당한 것은 진보적이지 않아서 좌파로 뒤집어씌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평가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이) 1990년 3당 합당으로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그래서 나는 결국 20년 동안 김영삼 씨가 만들어놓은 구도와 싸우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 때 이에 반대하며 당시 민주당 잔류를 함께 선언한 김정길 의원과 함께 공개적으로 김영삼 총재의 정계은퇴를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책 속에서 “(당시) 김영삼 씨가 넘어가지 않고 이쪽에 버티고 있었다면 이쪽 사람들의 의식 자체가 전혀 다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후에 정치를 했는지 모르지만, 다른 생각으로 정치를 했다고 가정하면 정말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김영삼 씨의 존재 자체가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회 척결이나 금융실명제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업적의 수준을 넘어서는 역사…”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나회 숙청’에 대해 스스로 높은 업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5년 한 강연회에서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가 그대로 있었으면 김대중, 노무현도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며 “쿠데타를 주도했던 하나회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 수도사령관 혼자서도 쿠데타를 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끊어졌던 YS와의 관계를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이던 2002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다. 후보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1시간 20분간 ‘단독회동’한 사실이 전해진 것. 이에 대해 당시 노무현 후보의 유종필 특보는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며, 추억과 소망을 섞고 봄비로 죽은 뿌리를 일깨운다”는 엘리엇의 시 ‘황무지’ 구절을 인용할 정도로 의미부여를 한 바 있다.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정치권을 술렁이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실권을 가진 총리와 내각을 야당에게 주고 그 대신 선거구 개편을 받으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므로 훨씬 큰 정치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탄핵사건 때문에 야당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고도의 술수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고 전혀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자신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었다는 아쉬움도 토로했다. 대통령 권력을 ‘동거’정부로 해서 운용해보려고 하는데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과 정치조직이 과연 이것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점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2005년의 대연정 제안은 ‘뼈아픈 실책’이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대표를 맡았던 박근혜 전 대표 역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위즈덤하우스)에서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대해 밝힌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연정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처음엔 그냥 무시했다고. “왜 연정을 하자는 것인지 대통령의 말도 오락가락할 뿐 아니라 상식적으로 국정 철학과 정책 노선이 확연히 다른 당에게 연합정치를 제안한 이유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것.
당시 박 전 대표가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수락한 이후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말 잘하는 ‘토론짱’인데 괜히 회담을 수락해서 대통령에게 말려드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책 속에서 9월 7일 청와대에서 이뤄진 대통령과의 회담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나는 민생을 말하고 대통령은 대연정을 말했다. 대통령은 솔직하면서도 집요했다. 때로는 좀 듣기 거북한 거친 표현을 구사했는데 기싸움에서 이기려는 의도된 표현처럼 보였다. …‘더 이상 대연정을 말씀하시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으나 나의 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 대통령은 오히려 ‘노무현 시대를 빨리 끝내는 것이 어떨까라고도 생각해봤다’면서 임기 중단을 의미하는 발언을 했다.”
결국 회담은 평행선을 그린 채 끝났고 다음날 박 전 대표는 해외 순방길에 올라 해외에서 생신을 맡게 된 노 전 대통령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나의 덕담에 ‘옛날에는 생일도 별로 챙기지 않았다. 나는 태어날 때 태몽도 없었다. 전설이 없는 지도자다’라는 다소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정치적 공통분모 없이 서로의 거리감만 확인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던 셈이다.
한편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 대북정책의 핵심인물이었던 박철언 전 정무장관 역시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대해 평한 바 있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랜덤하우스중앙)에서 그는 “법률가로서 의원내각제가 민주주의 원칙에 보다 충실한 제도다. 지금의 시대적 과제와 국가 목표 성취를 위해서는 의원내각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대통령이 내각제적 운영이나 대연정을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통합해서 잘해보자는 선의의 시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야당에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용한 대화, 절충점을 찾았으면 더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그는 “대통령을 모시는 참모들이 미흡했다. 순수하게 미래 지향적인 방안을 이야기할 때 참모가 다듬고 여러 차례 건의해 실현 가능하도록 국민적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대연정 제안이 무참히 무산된 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 다시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한다. 그가 이처럼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를 갈망했던 것은 대통령을 하면서 느꼈던 현실적 벽 때문이었다. 다음은 책 속에서 노 전 대통령이 토로한 개헌 제기의 배경.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6년차가 되면 보통 국회가 여소야대가 된다. 그리고 당내의 국회의원들도 협조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것을 이른바 레임덕이라고 이야기한다. 의회를 여당이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또는 여당이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지 않는 상황, 이 모두를 포함해서 권력누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만든 대통령 법안이 국회에 가서 부결되면서 점차 국민들의 신망도 잃어간다. 대통령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국민들도 ‘엇! 힘도 없는 사람이!’ 이러면서 무게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언론도 조금 냉소적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권력누수 현상인데, 그렇다면 저는 취임하는 그날부터 권력누수 상태, 말하자면 레임덕 상태에서 지난 5년을 지내온 것이다. 잠시 중간에 6개월 정도는 아니다 싶은 때가 있기는 했다. 그래서 한국 정치구조에 문제가 있어서 이것은 개헌을 통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개헌을 제기한 것이다.”
# 정치인과 돈
“실패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뼈아픈 고통이다. 그것도 회복이 가능하지 않은 실패인 경우에는 죽음과 다름이 없는 고통이다.”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로 궁지에 몰리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남긴 글에는 자신의 ‘실패’가 얼마나 가슴 아픈 고통이었는지 드러나 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우화에 빗댄 ‘노공이산’(盧公移山)이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리던 그는 이 필명을 내리면서 “과오는 과오입니다. 나도 변명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과오는 과오로 인정해야 합니다. …주변 관리는 정치인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털어도 먼지 안 나게 살아야지요”라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면서 ‘돈’과 ‘언론’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것 같다. 그는 ‘권력수단이 중요하다. 여론의 정치, 언론의 권력과, 언론과 돈, 언론권력의 무책임성과 신뢰의 붕괴’라고 메모 글을 쓰기도 했다. 또 ‘정치하지 마라’는 제목의 글에선 정치인을 ‘대책 없는 사람’으로 표현하면서 “생활비 확보 방법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 그래도 품위와 모양을 갖추어야 하는 사람들, 노후 대책이 없는 사람들, 친구도 고향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렸다. 정치와 돈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적은 ‘돈을 벌어라’라는 대목은 특히 가슴에 와 닿는다.
노 전 대통령은 “사실 나는 초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난 이후로 ‘깨끗한 정치’라는 말을 한 번도 입에 올린 일이 없다”며 언젠가 자전거 타고 국회 등원하는 선배 의원에게 ‘환상을 심지 말라’고 비판한 일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깊은 속내에는 ‘검찰수사’에 대한 원망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판자들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라며 “민심인가? 역사적 과제인가?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또 ‘대통령’의 자리란 왕이 아니고, 대통령이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며,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대통령에 대한 오해’가 있음을 밝혔다. 그가 ‘대통령이 할 수 없는 일들’이라면서 언급한 것들은 ‘국회, 야당, 여당, 언론, 이익집단, 시민사회, 민심, 권력기관, 관료조직, 국제관계’였다. 또한 대통령에게는 너무 많은 금기가 있다면서 ‘연극과 골프’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기 바란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실패 이야기는 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실패가 여러분의 실패는 아니다”라고 강조한 것. 더불어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 길을 가야 한다. 몽땅 덮어씌우려는 태도도 옳은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극복해야 할 자세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일이 있고, 역사는 자기의 길이 있다”고 당부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