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고싶어 ‘봄봄’
▲ 도산서원(위)과 가송리 쏘두들(가운데). ‘쏘두들’이란 지명은 절벽 사이에 있는 깊은 소(沼)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가송리에 있는 퇴계선생이 자주 걷던 ‘예던 길’.(맨아래) | ||
도산면 일대는 일찌기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 등 이름난 유학자의 향리며, 그들이 귀거래로 유명하다. 특히 퇴계 선생이 황혼녘 인생의 화두를 던지며 ‘녀던 길’이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佳松里)에 남아 있다. 가송리는 낙동강 7백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도 해도 넘치지 않을 곳이다.
‘고인(古人)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못뵈 / 고인을 못봐도 예던(녀던) 길 앞에 있네 /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꼬.’(이황 <도산12곡> 중)
예던 길(녀던 길)이란 ‘다니던 길, 걷던 길’이란 뜻이니, 곧 선인들이 행한 ‘도리’를 은유하기도 한다.
퇴계 선생은 고인들이 예던 길을 걸었고, 다시 우리는 선생이 예던 길을 따라 걷는 것이리라. 퇴계 선생이 자주 걷던 지금 안동의 도산서원 너머 퇴계 종택으로부터 농암 종택이 있는 가송리까지 옛길은 ‘예던길’이란 이름으로 복원되어 있다.
길은 도계에서부터 상계 하계, 시인 이육사 생가가 있는 원촌, 단사를 거쳐 가송리까지 이어진다. 길은 다시 강을 거슬러 청량산 입구까지 이어진다.
안동댐 공사로 대부분 그 원형을 잃었으나, 다행히 가송리 일대는 옛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선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옛길로 사랑을 받고 있다.
옛길의 원형을 간직한 가송리는 청량산 남쪽에 위치한 산촌이자 강촌이다. 낙동강 7백리 주변에서도 특히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길이다. 길은 청량산 못 미쳐 오른쪽으로 휘어지고, 크게 휘어도는 물돌이동을 따라 숲 속으로 숨어든다. 그 안에 이름처럼 솔숲이 아름다운 가송(佳松)리가 숨어 있다.
35번 국도가 시원스레 개통됐건만 아직도 큰길에서는 마을의 윤곽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강호에 묻혀 사는 은자처럼 마을 또한 그 모습을 쉬이 자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 겨울이 사르르 녹아가는 가송리의 그림 같은 전경(위). 긍구당(아래왼쪽), 농암종택(아래오른쪽) | ||
이곳 사람들은 고산협 맞은편의 독산(獨山)을 고산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강 건너편 산과 하나였는데, 용이 그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들 절벽 사이에 있는 깊은 소(沼)로부터 쏘두들이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고산에서 강 건너를 유심히 바라보면 절벽과 더불어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자가 서 있다. 퇴계의 제자 금난수라는 이가 짓고 즐긴 고산정이다. 고산정의 고즈넉함, 그 특별한 운치는 널리 알리기가 꺼려질 만큼 조심스럽다. ‘한국의 아름다운 정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정자는 퇴계가 청량산 가던 길에 자주 발걸음 멈추던 곳에 세워졌다.
쏘두들에서 강 건너 옹기종기한 마을이 보이면 가사리다. 좁고 긴 다리가 아슬하게 놓여 있다. 여기서부터 농암종택까지가 ‘예던길’ 트레킹 장소로 가장 좋은 곳이다. 맑은 하늘 아래 더 맑은 하늘이 흐른다. 강은 온갖 바위와 돌을 두드리며 경쾌하게 내달리는 중이다. 돌아보면 나를 좇는 듯한 층층절벽에 또 한번 아찔해지니 원시 절경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까.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퇴계 선생이 경치마다 시를 읊으며 붙여둔 이름이라고 한다.
‘6백년 종가의 역사를 다시 쓰다.’ 농암 종택은 가사리에서 다시 크게 휘감아 들어온 올미재에 자리를 잡았다. 가송리에서도 올미재는 산태극 수태극의 오묘한 조화 끝에 생겨난 넉넉한 땅이다. 조선시대 숭정대부를 지낸 농암 이현보(1467년~1555년, 숭정대부) 선생의 종가가 이곳에 있다.
지금 주인인 종손 이성원씨는 가사리 벽력암에서 올미재까지를 ‘행복의 길로 들어선다’고 표현한 바 있다. 산 강 돌 모래, 어느 것 하나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더욱이 선인들의 ‘녀뎐 길’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도 이성원씨다. 그는 온혜 도계 상계 하계 단천 가송리까지 퇴계 옛길의 자취를 모두 되짚어 찾아냈다. 옛길을 ‘예던길’로 부르기 시작했고 그 여정을 자세하게 소개하여 궁극에는 퇴계의 사상과 문학에도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퇴계의 진성 이씨 집안이 아니라 <어부사>를 남긴 농암의 17대 주손 영천 이씨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청백리 목민관이자 강호시인이던 농암과 학자 퇴계와의 교류는 이미 남달랐다.
농암은 정계를 깨끗이 은퇴하여 퇴계로부터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존경 받은 인물이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본래 고향인 부내마을(도산서원에서 2km 하류, 도산면 분천동)을 잃고, 30년이 지나서야 올미재로 이전해 복원됐다.
▲ 고산정 | ||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니, 매일이 새로워요. 모래는 또 얼마나 희고 고운지요. 어떤 날은 남편과 둘이서 모래사장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잖아요. 그 사이에 불어온 바람에 발자국이 사르르 지워져버리곤 해요.”
고향을 잃고 방황하던 이성원씨가 올미재를 발견한 것도 벌써 10여 년 전의 일. 퇴계 종택이 있는 도계에서 출발해 상계 하계를 지나 시인 이육사의 마을인 원촌을 거치며, 마치 퇴계가 거닐던 옛길을 따라 걷듯 청량산의 남쪽 끝까지 걷고 나서야 지금의 올미재를 만났다.
지금의 종택은 2천 평 대지 위에 사당 안채 사랑채, 문간채의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과 긍구당은 이전해온 것이고 나머지는 분천동 당시의 종택 모습을 되살려 새로 지었다. 긍구당은 처음 지어진 지 6백1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건물로 농암이 태어났던 곳. 17대 종손 이성원씨도 여기서 나고 자랐다. 가로 세 칸, 세로 두 칸의 건물에 자그마한 온돌방을 들였다. 여러 번 이전하는 가운데도 당당하고 우아한 고택의 자태가 여전하다. 나머지 분강서원이나 애일당 등 흩어진 유적 공간도 곧 이전해 올 계획이다.
종손은 얼마 전부터 종택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불천위(不遷位:국가나 지역, 유림 등으로부터 인정받은 인물을 영원히 사당에 모실 수 있도록 허락된 제사) 종가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종가의 문화를 어떻게 지켜가야 하는가” 그 자신도 지금 실험무대에 올랐다고 말했다.
현재 ‘예던길’을 따라 가는 길은 고산정에서 농암종택까지(도보 30분 정도)와 단천교에서 면천마을까지(도보 30분 정도)가 일반적이다. 농암 종택의 도움을 받는다면 강변길을 따라 더 멀리 다녀올 수도 있겠지만, 아쉬움은 종손 이성원 선생의 강호문학 이야기를 듣는 걸로 풀어도 좋을 것이다. 종가 체험과 함께 퇴계 옛길을 아우르는 자연의 경이로움, 선인들의 ‘녀던 길’에 담긴 담백한 삶의 진리를 좇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고마운 여행이 될 것이다.
여행TIP
▲복원 : 가송리는 매일 달라지고 있다. 예던길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새로운 길이 생기고 옛길이 자취를 감추는 것도 시간문제. 그나마 단천교∼고산정에 이르는 6km 구간 오솔길이 올 가을께면 제 모습을 찾게 될 예정이다.
▲주변 볼거리 : 도산면 주변에 도산서원 퇴계종택 도산온천 이육사문학관 등 유적과 기념관이 인접해 있다. 이 유적과 기념관은 가송리 농암종택까지 가는 여정에 있어서 어렵지 않게 들러볼 수 있다. 그밖에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담 학소대 등 명소가 많으므로 여유있게 시간을 잡고 가도록 하자. 옛길 전체는 이어져 있지 않다.
▲교통: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 남안동IC-안동 시내 방면-35번 국도(봉화 방면)-도산면-도산서원 지나 10여분-오른쪽으로 농암종택 팻말 보고 우회전.
▲농암종택: 숙박 가능. 사랑채 문간채 등 방에 따라 1박 3만~8만원, 모든 식사는 5천원씩 받는다. 054-843-1202
www.nong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