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적 대통령제 이대론 안된당께”
▲ 07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헌법개정시안 발표와 관련 특별기자회견을 가졌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4년 중임제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국회의장 자문기관인 헌법연구자문위원회(위원장 김종인)도 이보다 앞선 8월 31일 현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이원정부제 혹은 중임 정·부통령제로 변경하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인사청문회를 마친 여야는 ‘정치·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개헌 문제를 오는 10월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 이후 본격적으로 다룬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뤄져왔던 개헌논의가 정치세력 간 첨예한 이해대립으로 번번이 탁상공론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역시 무위로 그칠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벌써부터 개헌 시기 및 규모 등을 놓고 여·야의 온도차가 확연하게 감지되고 있어 향후 치열한 공방을 예고하고 있다. 만약 생전의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노짱’(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면 뜨거워진 개헌론에 어떤 방점을 찍었을까.
DJ는 22년 전 마지막 개헌(9차)을 이끌어냈던 당사자이고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중 개헌을 제안한 바 있다. 이 시점에서 두 정치 9단들의 생각을 되짚어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을 듯싶다.
‘의회 민주주의 신봉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할 당시만 해도 국회가 중심이 되는 내각제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87년 온 국민의 열망이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후에는 대통령제를 내각제보다 우위에 놓았다고 한다. 동교동계인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은 “DJ는 1987년을 기점으로 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방향을 틀었다고 보면 된다. 개헌을 할 경우 대통령제보다는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국회를 양원제로 바꾸는 것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고 귀띔했다.
DJ가 개헌카드를 본격적으로 꺼내든 것은 지난 1997년 대통령 후보자 시절이었다. 각각 호남과 충청지역에 기반을 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이른바 ‘DJP 연대’를 통해서였다. 새정치국민회의는 당의 강령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삭제하고 그 자리에 내각제를 새롭게 추가했다. 김대중 당시 후보자는 대선주자 토론회 등에서 “신한국당(현 한나라당) 내에 내각제를 지지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어 가능하다”며 개헌 추진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DJ는 대통령 당선 이듬해인 1999년 7월 내각제의 뜻을 사실상 접었고, 이로써 DJP 연대도 깨졌다. 태생적으로 개헌의 불씨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국민의 정부’가 그 끈을 내려놓은 것이다. 동시에 헌법 개정에 대한 공론도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이에 대해 동교동계 ‘막내’ 격인 설훈 전 민주당 의원은 “DJ가 평소 가장 이상적인 통치 형태는 내각제라고 말했던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만 국내 여건상 대통령제가 당분간은 유지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것으로 안다. 당시 역시 외환위기 등의 극복을 위해 내각제로의 전환이 힘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DJ가 개헌의 뜻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최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재직할 당시 DJ와 개헌에 관해 두 차례 정도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DJ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와 나누는 것에 긍정적이었다”고 떠올렸다.
▲ 김대중 전 대통령. | ||
DJ는 “정·부통령제를 해야 한다. 보수적인 사람과 개혁적인 사람을 동시에 임명해 정부가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DJ는 “18대 국회에서 (개헌이)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김경재 전 의원은 “DJ는 대통령제를 유지하되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떼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셨다”고 설명했다.
DJ의 최측근인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최근 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중심제를 선호했지만 자꾸 문제점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분권형 대통령제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전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당의 한 의원은 “DJ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있는 민주당으로서는 당연히 개헌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 맞다. 한나라당이 개헌 정국을 주도하고 있어 참여를 망설이고 있지만 이것은 개헌을 염원했던 DJ 뜻과는 배치되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DJ와 마찬가지로 지난 2002년 대선에서 ‘개헌론’을 승부수로 던졌다.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표(현 한나라당 대표)와 후보 단일화를 하면서 정 대표가 제안한 분권형 대통령제를 대선 공약으로 받아들인 것.
둘은 선거 전날 갈라섰지만 그 공약만큼은 노 전 대통령도 상당히 공감해 임기 중에 실현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친노 인사로 꼽히는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제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고 내각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전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과 총리가 권한을 나눠 갖는 이원정부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6년 안희정 이화영 등 친노 의원들, 개헌에 적극적이던 민병두 의원 등을 이끌고 이원정부제를 실시하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을 방문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이원정부제로의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기도 했다. 그 후 노 전 대통령은 이원정부제가 국내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 대통령 4년 중임제로 그 방향을 수정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인 지난 2007년 1월 9일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을 제안했다.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제로 바꾸고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를 맞추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다른 조항은 놔두고 간단하게 대통령 임기 조항만 고치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원 포인트 개헌’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개헌 제안은 한나라당으로부터 ‘정략적인 발상’이라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놓고 박근혜 전 대표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멘트를 던지기도 했다. DJ는 “국민여론과 정부가 생각하는 입장이 잘 절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신중론을 펼쳤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18대 국회에서 개헌 문제를 논의한다”는 여야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만족하고 개헌 발의를 포기했다.
노 전 대통령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현재 이뤄지고 있는 개헌론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약속한 대로 18대 국회가 지난해 개헌을 논의하기 위한 미래한국헌법연구회와 헌법연구자문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은 이번 개헌론을 ‘정국 전환용’ ‘지방선거 대비용’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민주당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대통령, 국회의장, 여당 원내총무 등이 동시에 헌법 개정에 목을 매고 나선 것을 두고 정가에서는 ‘뭔가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당은 DJ와 노 전 대통령이 개헌에 공감하고 앞장섰던 터라 무작정 반대만 하기도 어렵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자칫 개헌 문제가 야권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