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이용한 ‘올빼미 공시’가 또 다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설 연휴 직전인 지난 14일, 한미약품과 한국항공우주산업 등이 장 종료 후 회사의 악재를 공시해 투자자들의 분노를 샀다. 고성준 기자
한미약품은 지난 14일 장 마감 후인 오후 3시 51분, 면역질환 신약후보물질(LY3337641, HM71224)에 대한 임상시험이 중단됐다고 밝혔다. ‘HM71224’는 다국적 제약회사인 일라이릴리에 약 7억 달러 규모로 기술 수출됐던 물질이다.
KAI 역시 같은 날 오후 3시 47분, 지난해 영업손실과 당기순손실이 각각 1971억 원, 2349억 원으로 적자 전환했다고 공시했다. 매출은 전년 대비 30% 감소한 2조 387억 원을 기록했다. 흥아해운은 이보다 더 늦은 오후 5시 27분, 지난해 영업손실이 1298만 원을 기록하며 적자 전환했고 당기순손실은 7343만 원으로 전년 대비 300% 이상 늘었다며 악화한 손익구조를 털어놨다.
이처럼 ‘올빼미 공시’란 기업 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만한 내용을 장 마감 후나 주말·연휴 직전에 공시하는 것을 말한다. 투자자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에 공시함으로써 급격한 주가 하락을 막고 악화된 투자심리를 휴장일 동안 희석시키려는 것이다.
기업 결산 시기와 맞물린 이번 설 연휴엔 이 같은 공시 행태가 더욱 두드러졌다. 설 연휴 전날인 지난 14일 장 마감 후, 자사에 불리한 내용을 공시한 코스피·코스닥 기업은 10곳이 넘었다. 기업들의 올빼미 공시 탓에 회사를 믿고 투자한 투자자들은 금전적·심리적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올빼미 공시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2006년 야간·주말 공시가 폐지되면서 그나마 기업들의 이 같은 꼼수가 적잖이 사라진 셈이다. 2006년 이전에는 주말은 물론 늦은 밤 시간에도 악재성 공시가 심심찮았던 것. ‘올빼미 공시’라는 말도 늦은 밤 시간에 낸다 해서 나온 말이다. 2006년 금융감독원은 올빼미 공시 행태를 개선하고 공시의 정확·신뢰성을 높이고자 공시서류 제출시간을 ‘평일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에서 ‘평일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변경했다. 비록 시간을 단축했다 할지라도 ‘오후 6시까지’로 했기 때문에 제도의 틈을 노린 기업들의 올빼미 공시가 여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시간을 더 단축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기업들의 의사결정 시간, 장 마감 후 시간외매매, 공시의 전파성 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6년 금융감독원은 공시의 정확·신뢰성을 높이고자 공시서류 제출시간을 단축했으나 올빼미 공시는 여전하다.
한국거래소는 기업들의 이 같은 행태를 제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다. 거래소 관계자는 “이를 처벌하기 위해선 해당 공시가 의사결정 이후 곧바로 이뤄졌는지 혹은 인위·악의적으로 시간을 조정했는지 판별해야 하는데, 1년에 1만 5000건이 넘는 공시를 일일이 점검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뿐 아니라 문제 삼기도 모호하다”고 설명했다. 기업에 대한 거래소의 벌점 부과, 불성실공시법인 지정은 현재 공시불이행·번복·변경 등에 한해서만 이뤄지고 있다.
올빼미 공시가 무조건 다음날 주가 급락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설 연휴 직후인 지난 19일 한미약품 주가는 8.50%나 하락했지만 KAI와 흥아해운 주가는 각각 5.37%, 4.87%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악재의 정도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올빼미 공시라도 그 내용이 심각하거나 예측 불가하다면 휴일을 거쳐도 주가 하락을 모면하긴 힘들다”며 “반대로 단기적 관점에선 문제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악재가 아닐 경우 올빼미 공시는 시장에서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한미약품의 공시는 우리 돈으로 무려 7500억 원이 넘는 수출 계약이 위태로운 데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던 반면, KAI와 흥아해운의 공시는 예측 가능한 일이었던 데다 회복 가능한 수준이었다는 의미다. 이것이 올빼미 공시를 한 해당 기업의 주가가 다음날 상반되게 움직인 이유다.
주식시장에서도 KAI의 악화된 손익구조는 이미 예측된 일이었을 뿐 아니라 올해에는 미국 고등훈련기(APT) 교체사업 참여 등으로 실적이 반등할 것이란 기대심리가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반면 한미약품이 공시한 임상시험·기술수출 중단은 매출액 감소로 이어질 수 있어 투자심리 악화는 불가피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투자자들의 피해가 크다는 점에서 올빼미 공시의 폐해는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금융당국의 별도 규정 마련 외에도 시장 내 자정적 해결을 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상범 한국항공대 경제학과 교수는 “규제가 어렵다는 점엔 동의한다”면서도 “올빼미 공시는 공매도·내부자거래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니만큼 불법요소 판별과 더 세세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신세돈 교수는 “투자자들 스스로 불성실공시 기업에 대한 투자를 줄여 자정적 해결을 이끌어내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올빼미 공시에 대해 무조건 제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주식시장엔 이성적·분석적 요소와 비이성적·감성적 요소가 함께 공존한다”며 “올빼미 공시가 후자 요소를 제재해 시장 내 과열·과민반응을 방지한다는 이점도 무시할 순 없다”고 말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