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기다려 고운 얼굴 보노라
▲ 선운사 꽃무릇 군락지. | ||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하는 운명. 마침내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붉은 꽃이 되었다는 꽃무릇이 드디어 꽃을 피웠다. 가녀린 꽃대 위에 선홍빛으로 타오르는 꽃무릇 여행은 지금이 절정이다. 대개는 9월 중순에서 9월 말까지 만개하지만 올해는 추석 전후로 가장 화려하다. 특히 꽃무릇은 개화기간이 매우 짧아서 때를 놓치면 다음해를 기약해야 한다. 때문에 꽃무릇을 기다려온 사람들은 오늘, 내일 하며 가슴을 졸이기 다반사다.
흔히들 꽃무릇을 ‘상사화’(相思花)나 석산(石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상사화와 꽃무릇은 다른 꽃이다. 물론 같은 수선화과로 꽃이 진 다음에 잎이 난다거나 꽃잎이나 모양 등 거의 비슷한 형태와 성질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상사화는 꽃대가 60~70cm까지 자라며 황색 또는 등황색의 꽃이 달리고 7~8월에 꽃이 핀다. 대신 9월에 만개하는 꽃무릇은 50~60cm 꽃대에 손바닥만 한 붉은 꽃이 핀다.
꽃무릇이라는 이름도 들판 한가운데 피기보다는 단풍나무 그늘에 숨어 무리 지어 핀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은 꽃무릇과 상사화를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고 요즘 ‘상사화’라고 하는 꽃이 대부분 꽃무릇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현재 꽃무릇 군락지는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힐 정도 귀하다. 일본이 원산지라 자생적으로 피는 곳은 없다. 주로 사찰 주변에 많이 심는데 특히 고창의 선운사, 함평의 용천사, 영광의 불갑사 등이 유명하다.
유독 절 주변에 꽃무릇이 많은 이유를 두고 ‘스님을 사모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도 떠돌지만, 사실 낭만적이거나 애틋한 사연과는 거리가 멀다. 꽃무릇 뿌리에 있는 독성(알칼로이드로 방부효과가 있다)을 탱화를 그릴 때 함께 사용하면 좀이 슬지 않아서 스님들이 직접 키웠던 꽃이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피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함평 용천사에서부터 영광의 불갑사, 고창 선운사 순으로 피기 시작한다.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 코스로 세 곳 모두 다녀올 수도 있다.
운치로 따지면 선운사의 다소곳한 꽃무릇을 따라올 곳 없다. 특히 물안개가 자욱한 새벽녘 선운사 초입에서 만나는 꽃무릇은 첫사랑을 만난 듯 수줍고 반갑다. 꽃이 아니라도 좋았을 선운사지만, 꽃무릇 덕분에 단풍이 들기 전까지 적적함을 달랠 수 있어 더 좋다. 선운사의 꽃무릇은 사찰 초입의 넓은 공원에서, 또 진입로를 따라 이어지는 계곡 길에서 또 한번 절정을 맞는다.
▲ 선운사 꽃무릇 군락지. 그리움을 피워낸 듯 참 곱고도 붉게 피었다. | ||
꽃무릇은 붉다고 하기엔 너무 단조롭고 선홍색이라고 하면 조금 모자란 색감을 지녔다. 아침저녁으로 또는 빛의 양에 따라 조금씩 달라 보이는데 실제 모습은 새색시의 입술 같은 다홍빛을 띠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본 꽃은 돌돌 말린 꽃잎의 화려함과 미묘함, 그리고 사방으로 힘 있게 뻗은 수술의 현란함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선운사의 꽃무릇 길은 선운산 중턱까지 이어진다. 선운사 옆 좁은 계곡 길로 올라갔다가 다리를 만나면 좌측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 나오는 코스가 추천할 만하다. 초입의 잔디 위를 가득 메운 꽃무릇도 반갑지만 계곡 숲길에 비밀스럽게 터지는 꽃무릇은 더 강렬한 유혹이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에는 드라마 <대장금>을 촬영했던 조그마한 녹차밭도 둘러볼 수 있다.
불갑사와 용천사는 지역적으로는 영광과 함평으로 나뉘지만, 모두 불갑산에 기대어 있는 고찰이다. 산의 양 반대쪽에 위치해 있으나 꽃무릇 군락지로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불갑사는 규모 면에서 전국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로 소문이 나 있다. 최대 규모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꽃무릇의 색이 가장 고운 것만은 틀림없다. 붉은 융단을 펼쳐놓은 듯한 꽃무릇의 절경을 봤다면 대개 불갑사의 꽃무릇으로 보면 된다. 매년 몰려드는 사진작가들 때문에 추석을 전후로 전국 사진촬영대회나 꽃길 등반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384년) 때 인도스님 마라난타가 지은 불법도량으로 현재는 개보수를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거대한 일주문이 완공을 앞두고 있고 주변의 넓은 터는 깔끔한 공원으로 조성중이다. 주위가 소란한 와중에도 꽃무릇은 무탈하게 크고 있었다.
초입에서는 무리지어 있는 꽃무릇을 찾기 힘들다. 주로 길가의 큰 나무 밑이나 바위 아래에서 드문드문 피어 주목을 끄는 정도. 습한 곳을 좋아해서 불갑사의 꽃무릇 역시 계곡 주변으로 가장 많다. 계곡 양쪽으로 붉은 수를 놓은 듯 퍼져 있다. 막 꽃대가 올라온 꽃무릇부터 활짝 만개한 꽃무릇까지 같은 환경에서도 저 마다의 성질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부도밭, 대웅전 뒤편, 계곡 주변 등이 주요 관람 포인트다.
▲ 선운사 꽃무릇은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다홍빛을 띠고 있다. | ||
불갑산에서 산을 타고 넘으면 백제 시대 고찰인 용천사다. 용천사는 절 들머리 산책로를 따라서 꽃무릇을 보며 걸을 수 있다. 양 옆으로 30만 평의 숲에 군락을 이루고 있어 가장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용천사에 바로 올라가기보다는 산책로를 따라 꽃무릇을 감상한 뒤 용천사로 내려가는 길이 추천 코스. 약 30분 정도 걸린다. 초가 정자나 벤치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가족과 함께 가기 좋은 곳이다.
용천사에서 불갑사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꽃무릇이 지천으로 폈다.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이 아니라면 꽃무릇 드라이브 코스로 그만이다. 선운사에서 불갑사까지 30분, 불갑사와 용천사가 10분 정도 거리에 있어 세 곳의 꽃무릇을 모두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없다.
▲가는 길 : 선운사-불갑사-용천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22번 국도-선운사, 선운사에서 불갑사까지는 영광 방면 22번 국도를 타다가 함평방면 23번 국도로 갈아타면 된다. 혹은 영광IC에서 내려 23번 국도를 타다가 ‘불갑사’ 이정표를 따라 달리면 된다. 용천사는 불갑사에서 10분 거리.
▲여행 Tip : 선운사 주변에는 미당 서정주 문학관이 가볼 만하고, 풍천 장어 요리전문점이 많다. 불갑산 주변에는 불갑저수지, 내산서원, 용천사, 원불교 성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