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들 돈 받았어도 처벌하긴 어려워”
서울 강서경찰서는 강서구 한의협 회관과 김필건 전 협회장 자택, 협회 관계자가 운영하는 한의원 등을 2월 22일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김 전 회장 등이 2013년부터 지난 3년간 협회비 수십억 원을 횡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수억 원을 ‘활동비’로 별도 관리해 입법을 위한 정치권 로비활동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한의사협회가 협회비 횡령 의혹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진은 한의협 홈페이지 캡처.
한의협의 부정한 회계처리는 지난해 6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김필건 전 회장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드러났다. 선관위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정보공개 대상이 되는 후원금 기준인 300만 원 미만으로 돈을 쪼개어 여러 명의 국회의원에게 제공했다. 김 전 회장은 2016년 총선과 연말, 두 차례에 걸쳐 4100만 원 상당을 38곳의 국회의원 후원회에 기부했다. 그런데 개인의 연간 후원금 총액한도(2000만 원)를 넘긴 것이 문제가 된 것. 현재 검찰은 해당 혐의로 김 전 회장을 기소한 상태다.
후원금 초과 문제로 계좌를 추적하던 과정에서 횡령 혐의가 드러나 경찰이 압수수색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은 압수수색한 한의협의 하드디스크와 김 전 회장의 휴대폰을 분석하고 있다. 이목은 한의협의 눈먼 돈이 결국 어디에 쓰였나에 집중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 분석단계에서 정확한 횡령 금액과 그것이 어디에 쓰였나를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이 후원금 기준을 어겨가면서도 의원들에게 후원금을 내놓을 당시 한의협의 최대 쟁점은 엑스레이와 초음파 등 현대의학기기를 한의학에 도입할 법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동안 한의계는 사양산업이라는 안팎의 위기의식에 그 돌파구로 현대의학기기를 도입하는 것을 꼽고 있었다. 한의협은 후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한의협은 이 같은 법안을 국회에 요구하고 있었다.
2017년 9월 김명연 새누리당 의원(현 자유한국당)은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한방 의료행위에 사용되는 장치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진단용 방사선 발생장치의 경우는 안전관리책임자에 한의사를 포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의학기기를 한의학에 도입할 수 있는 한의계의 숙원이 정식으로 발의된 것. 김명연 의원을 필두로 해당 의안을 제안한 14인의 국회의원에는 새누리당, 국민의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두루 포함돼 있다.
지난 2017년 9월 22일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보건복지제도개선 특별위원회 정책공조 협약식 기념촬영 모습. 박은숙 기자
한의협은 보건복지위원회 의원들을 주로 후원한 의혹을 받고 있다. 사정당국에 따르면 한의협은 보건복지위 의원을 보좌한 경력이 있는 국회 보좌관을 협회에 영입해 이를 창구로 로비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 정책기획을 맡던 국회 보좌관 출신 A 씨를 매개로 로비가 이루어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
한의협의 횡령 및 로비 의혹에 대한의사협회는 즉각 성명을 내고 “그 어떤 문제보다 중요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법안을 놓고 입법로비를 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반드시 일벌백계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의협과 같은 이익집단은 집단 공동의 이익을 위해 정부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정부나 국회를 상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입법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창구 역할을 하는 것이 본연의 업무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금품 등을 통한 로비활동까지 이뤄지곤 한다는 것.
현재는 한의협의 로비 의혹이 불거졌지만 2014년에는 대한치과의사협회의 불법 입법자금 의혹, 2007년에는 대한의사협회의 불법 입법자금 의혹이 불거졌었다. 모두 비슷하게 쪼개기 후원금 지급으로 입법로비를 한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을의 입장인 이익단체보다 갑에 있는 입법자들, 즉 국회의원에 있다는 지적이다.
한 대기업 대관업무 담당자는 “규제 하나로 기업 생사가 달려있는 문제라 대관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을 중의 을”이라며 “의원들이 접대나 향응을 받는 데 익숙하다. 먼저 향응 제공을 요청하는 일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검찰에서도 사안이 국회의원 입법로비로 확대될 수 있어 주시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정당국 한 관계자는 “남부지검에서 사안을 인지하고 있고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남부지검은 현재 금융권 채용비리를 집중적으로 수사하고 있어 한의협 횡령 문제는 경찰의 수사 결과를 우선 기다려보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횡령한 돈 수억 원이 특정 의원들에게 접대비, 후원금으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정작 돈을 받은 의원들을 처벌하기는 어렵다. 단체나 협회 차원에서 제공된 금품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 기업이나 이익단체가 쪼개기 후원을 하는 것도 이 같은 법의 맹점을 이용한 데 있다. 입법로비 사건을 수사했던 한 검찰관계자는 “입법로비 사건은 자주 일어나도 최종 금품 수수자인 의원까지 처벌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쪼개기 후원금을 받아서 협회에서 나온 돈인 줄 몰랐다고 주장하면 그만이다”고 토로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
김필건 전 대한한의사협회장은 누구? 김필건 전 회장은 1961년생으로 부산고등학교, 동국대 한의대를 졸업했다. 한의협 중앙대의원, 강원도한의사회장, 한의협 비대위 수석부위원장을 역임하고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한의협 회장으로는 제40대에 당선됐고 41대 회장으로 재선임됐으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해임됐다. 김 전 회장은 △한의사 의료기기 문제 해결 △질환별 한의진료 매뉴얼 사업 및 건강보험보장 확대 △회비사용 투명성 제고 등을 주된 공약으로 내걸고 적극 추진해왔다. [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