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앞에 서면 나도 그림이 된다
▲ ‘바다의 횃불’인 등대와 어우러진 남애항의 장엄한 일출. | ||
김민기의 노래 ‘봉우리’의 한 소절처럼 바다는 그런 존재다. 어떤 아픔도 다 보듬어주는, 마치 어머니 자궁처럼 안전하고 평온한 바다. 팍팍한 일상의 쳇바퀴 같은 궤적을 힘들게 벗어나 고단한 삶을 위로받고 싶을 때, 그럴 땐 이곳으로 달려가라. 강원도 양양의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남애항’. 그 작은 크기에 비해 너무나 아늑하고 넓은 품을 가지고 있는 이 어촌은 놀라운 치유의 힘으로 나그네의 생채기 난 가슴을 어루만진다.
남애항은 초곡항, 심곡항과 함께 강원도 3대 미항(美港)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이곳은 바닷가에 핀 매화가 이 마을로 떨어졌다고 해서 ‘낙매’(落梅)라고 불려왔지만, 이후 남쪽바다라는 뜻으로 남애라 개칭됐다.
항구는 마주보는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 감싸 안는 모양으로 하나의 호수를 연상시킨다. 방파제 양쪽 끝에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각각 배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 소나무로만 뒤덮인 두 개의 이색적인 바위섬이 항구의 왼쪽에 1백여m 간격으로 서 있는데 이곳을 남애항 전망대로 단장중이다.
항구 내에는 방파제를 빙 둘러 고깃배들이 줄맞춰 정박해 있는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강릉 방향으로 남애항 바로 아래쪽에는 2km에 걸친 고운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겨울바다를 거닐며 사색하기 좋다.
그 유명한 7번 국도를 달리다보면 동해의 항구와 해수욕장을 대부분 만나게 되는데 남애항은 살짝 그 도로의 줄기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인지 알음알음으로 알려졌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이곳은 인파에 몸살을 앓을 일이 없다.
남애항이 이름을 얻은 것은 장엄한 해돋이 때문이다. 포근한 마을의 전경도 한몫했겠지만 동해안의 어느 곳보다 더 크고 붉게 떠오르는 태양이야말로 이곳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의 해돋이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바위섬과 등대 등 주변의 구조물들과 어우러져 이곳만의 매력을 물씬 뿜어내기 때문이다.
겨울 초입, 남애항의 해돋이는 오전 7시10분께 시작된다. 6시가 넘어서면서부터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하늘 부분이 서서히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데 금세라도 태양이 바다 위로 ‘툭’ 하고 솟아나올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긴장감 탓에 기다림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아무도 없던 방파제 위에 하나둘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다정한 젊은 연인, 늙은 노부부, 외로운 청춘…. 무언의 합의라도 있었던 듯, 저마다 멀리 바다의 끝을 응시할 뿐 함부로 고요를 깨뜨리는 이 하나 없다. 다만 태양이 수면 위로 정수리를 내밀기 전까지는….
▲ 남애항의 하루를 여는 어부들. 매운 바닷바람도 이들의 부지런함엔 기가 죽는다. 아래는 낚시를 하는 연인. | ||
사실, 사진촬영을 위한 ‘포인트’는 따로 있다. 조금 더 큰 태양을 보겠다는 욕심만 버린다면 아름다운 남애항을 배경으로 해돋이를 담을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어판장 옥상 위. 또 하나는 빨간 등대가 있는 왼쪽 방파제 시작점에서 30여m 떨어진 모퉁이.
어판장 옥상 위에서는 두 개의 등대 사이로 해가 뜨는 모습이 잡히고, 방파제 모퉁이에서는 남애항의 명물인 바위섬 바로 옆으로 불쑥 오르는 해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를 함께 담을 수 있다.
정 더 가깝게 해돋이를 보고 싶다면 배를 타고 앞바다로 나가는 ‘선상해돋이체험’도 가능하다. 단 어느 정도의 인원이 확보됐을 경우에 한해서다. 출렁이는 파도를 헤치며 아침해를 맞이하러 나가는 길. 시름과 아픔은 온데간데없고 단지 희망에 부푼 가슴만 있을 뿐이다.
배를 타고 나간 김에 낚싯대를 빌려 바다낚시도 할 수 있다. 흔들거리는 갑판 위에서 직접 고기를 잡아 회를 떠먹는 맛.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다만 유의할 점은 초보낚시꾼들이라면 멀미약을 반드시 챙길 것. 그래야 ‘특별한 경험’이 ‘끔찍한 경험’으로 바뀌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남애항이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는 바다만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애항에서 북쪽으로 5백여m 떨어진 현남면 포매리에는 전형적인 사호(砂湖) ‘포매호’가 있어 갈대숲을 산책하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바닷바람이 실어온 모래가 오랜 세월 둑처럼 쌓여 커다란 호수가 된 포매호는 백로와 왜가리 등 천연기념물 서식지로 유명하다. 70∼1백50년 정도 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서식지로서의 가치가 높다.
철이 지난 지금은 백로와 왜가리를 볼 수 없지만 대신 백로들이 떠난 그 자리에 청둥오리가 내려앉았다. 호수에는 민물고기가 풍부해 청둥오리들은 연신 자맥질을 해가며 먹이사냥을 하느라 바쁘다. 이따금 사람들의 인기척에 놀란 청둥오리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참 장관이다.
한겨울 호수가 얼면 이곳에는 빙어낚시꾼들이 몰려들어 겨울을 보낸다. 수박향이 나는 빙어를 잡자마자 초장에 찍어먹는 맛이 일품이다.
▲ 평화로운 남애항의 아침. 동해안 북부 지역의 겨울은 도루묵이 접수한다(위), 남애항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포매호. 포매호는 국내 최대의 백로와 왜가리 서식지로 유명하다. 겨울에는 청둥오리들이 호수를 찾는다. | ||
주문진은 그 이름이야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겨울의 주문진은 동해안 여행시 빠뜨려서는 안 될 코스다. 도루묵과 양미리가 유혹하기 때문이다. 남애항에서 남쪽으로 차를 달려 10분이면 닿는 주문진은 3백여m 이상 늘어선 건어물 가게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포구에는 싱싱한 횟감들이 풍성하다. 살이 통통 오른 광어 한 마리가 1만원, 잡어 여섯 마리를 회 뜨는 데 역시 1만원. 말만 잘 하면 덤으로 한 마리쯤은 그냥 얹혀 온다.
아무리 횟감이 싱싱하고 입맛 당겨도 역시 겨울의 맛은 도루묵과 양미리 구이다. 도루묵은 그 이름에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선조에게 한 어부가 ‘묵’이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바쳤는데, 선조가 먹고는 너무 흡족해 했다고 한다. 그 이름이 뭐냐고 묻는 선조에게 신하들은 ‘묵’이라는 이름이 민망했던지 ‘은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난이 끝난 후 그 맛이 그리웠던 선조가 ‘은어’를 다시금 잡아 올리게 해서 먹었는데, 처지가 달라져서인지 전혀 다른 맛이었다. 선조는 실망해서 ‘왜 맛이 다르냐? 이 고기가 은어가 맞냐?’고 캐묻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신하들은 ‘실은 ‘묵’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였다’고 이실직고했고, 이에 선조는 화를 버럭 내며 ‘도로 묵이라 부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도 예서 유래했다 한다.
그렇지만 상황이 변하자 입맛 또한 간사해진 선조의 실망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오돌오돌한 알이 꽉 차고, 살이 통통 올라 부들부들한 도루묵은 그야말로 일미다. 구워 먹거나 쪄서 먹거나, 찌개를 해먹어도 그 맛은 변함이 없다. 간혹 식해를 해서 먹기도 하는데 그 또한 별미다.
양미리는 꼭 불려놓은 멸치 같기도 하고, 줄여놓은 꽁치 같기도 하다. 말려서 조림으로 쓰거나 구워서 먹는데 뼈째 씹는 맛이 고소하다.
작년 겨울 도루묵과 양미리는 동해 북부 앞바다에서 대풍이었다. 올해는 아직 수온이 덜 떨어져 어부들의 애간장을 태우지만 머잖아 싸늘한 북풍이 불면 본격적인 도루묵과 양미리의 계절이 시작될 것이다.
[여행안내]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현남 I.C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속초 방면으로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이 남애항.
★숙박: ‘소라의 꿈’ 민박(033-671-7504), 청송민박(033-671-3420)
★먹거리: ▶동해안의 횟거리야 두말할 나위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맛’이 바로 막국수다. 현남면 입암리와 강현면 장산리 일대에 막국수촌이 몰려 있다. 각각의 막국수촌에서도 입암막국수(033-671-7447)와 실로암메밀국수(장산리·033-671-5547)가 가장 유명하다. ▶도루묵과 양미리 구이집은 주문진항에 즐비하다. 도루묵 구이는 다섯 마리 1만원, 양미리는 20마리 1만원.
★문의: ·양양군http://www.yangyang-gun.gangwon. kr ·문화관광과 033-670-2723 ·선상체험(1인당 2만원) 등은 현남면사무소에 문의 033-671-6301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