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페이·커제와 대국 수세 극복…예전이라면 돌 던졌을 테지만 물고 늘어져 승리
1일 중국 상하이 그랜드센트럴호텔에서 막을 내린 제19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본선3차전 13국에서 한국의 네 번째 주자 김지석 9단이 중국 주장 커제 9단에게 217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두고 한국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국내 예선에서 탈락해 주최사 와일드카드로 대표팀에 합류한 김지석 9단은 전날 열린 12국에서 5연승을 질주하던 중국의 당이페이 9단을 제압한 데 이어 중국바둑의 자존심 커제 9단마저 꺾었다. 특히 두 대국 모두 어려웠던 바둑을 종반 집념으로 역전승해 맏형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우승팀 한국의 박정환·김지석 9단, 신진서 8단, 목진석 국가대표팀 감독(왼쪽부터).
5억 원이라는 우승상금을 제쳐두고라도 4년 연속 중국에 우승컵을 넘겨줬던 한국으로서는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승컵을 가져와야 할 상황. 올해는 선수 구성도 좋고 출발도 좋았다. 89년생 김지석을 필두로 박정환(93년생), 김명훈(97년생) 신민준(99년생), 신진서(2000년생)로 구성된 농심배 대표는 역대 최연소 군단이었다. 특히 첫 주자 신민준 6단이 6연승을 기록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출발이 좋았다. 다만 중국 4장 당이페이의 후반 5연승은 예상에 없던 그림. 중국에서 속개된 3차전 첫 경기에서 당이페이는 3연승의 기세를 일본의 주장 이야마 유타 9단도 날려버렸고, 신진서도 그의 제물이 됐다.
신진서가 먼저 나온 데는 사연이 있다. 원래는 랭킹 4위 김지석이 2위 신진서 앞에 나오는 것이 맞고 김지석도 자신의 출전을 원했지만, 신진서가 자신이 당이페이를 상대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결국 신진서가 먼저 출전하게 됐다는 것이 후문. 신진서는 작년 LG배 준결승전에서 당이페이에게 당한 바 있어 설욕을 원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지석 9단(왼쪽)이 커제 9단을 이기고 우승을 결정지은 직후의 장면. 한국은 5년 만에 우승컵을 탈환했다.
당이페이를 상대한 김지석은 초반 유리하게 국면을 만들었지만 중반 하변 절충에서 실패하면서 비세에 빠졌다. 예전의 김지석이라면 그쯤에서 포기하고 머리를 흔들며 선선히 내려왔을 텐데 이번 김지석은 달랐다. 기자들이 ‘한국, 박정환만 남았다’는 기사를 작성하던 무렵에도 김지석은 최후의 최후까지 승부의 끈을 놓치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에 기가 막힌 수순으로 팻감을 늘리더니 반집승의 주인공을 상대에서 자신으로 바꿔놓았다.
“이번 농심배는 김지석에게 기대를 건다. 올 들어 13연승으로 한 번도 지지 않았고 기량, 특히 멘탈적인 부분에서 예전의 김지석과는 다르다. 김지석을 주시해달라”던 국가대표팀 목진석 감독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는 장면이었다.
커제 9단과의 최종국도 마찬가지 흐름이었다. 포석은 좋았지만 중반 좌변 흑 대마가 백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다시 비세에 놓였다.
1도
‘1도’가 바로 그 장면. 좌변 흑이 두 눈이 없어 흑이 괴로운 상황. 여기서 등장한 흑1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묘수였다.
2도
‘2도’ ▲에는 백1이 상식적이지만 그러면 흑2로 나가는 수가 성립한다. 다음 흑4에 백5의 보강이 필요해서 흑6부터 10까지의 차단이 성립하며 이건 거꾸로 좌변 백 5점이 잡혀버린다.
3도
그래서 멋지게 귀에서 사는 수가 성립했는데 그래도 아직 역전에는 이르지 못한 상황. 최소 1집반은 백이 남길 것 같다는 검토실의 예상이 있었지만 이번 농심배에서 유난히 집념을 불태우던 김지석은 또 하나의 대역전극을 준비한다. ‘3도’가 역전극이 완성되는 장면이다. 백1로 그냥 이은 수가 커제 9단의 패착이 됐다. 무조건 A로 패를 걸어가야 했다는 것이 현지 검토실의 견해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팻감은 백도 만만치 않아 피차 어려운 승부였다.
4도
실전은 흑6에 커제가 돌을 거뒀는데 계속 진행된다 해도 ‘4도’ 흑7까지 중앙 백집이 지워져서 백이 안 된다.
대국 후 시상식에서 김지석은 “농심배에 많이 출전했고 상하이도 여러 번 왔지만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내 손으로 우승을 결정짓게 돼 정말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동안의 응어리를 전부 털어버린 모습.
이것으로 한국은 역대 농심신라면배에서 12번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중국이 6번, 일본은 1번 우승을 차지하게 됐다.
한편 우승상금 5억 원은 각각 1억 원씩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우승 기여도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상금 분배는 대회 때마다 선수들이 직접 정하게 되는데, 정확히 밝히진 않았지만 우승을 결정지은 김지석 9단이 ‘우승결정 수당’을 인정받아 가장 많은 금액을 가져가게 되고, 6연승을 올린 신민준 6단이 그 다음이다. 또, 김지석 9단 덕에 이름만 올려두고 출전하지 않은 주장 박정환 9단은 1승도 거두지 못한 김명훈 6단, 신진서 8단과 같은 금액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신민준 6단은 상금 외에 6연승으로 4000만 원의 보너스를 챙겼기에(농심배는 3연승을 거둘 경우 1000만 원, 이후 1승 추가시마다 1000만 원씩 늘어난다) 이번 농심배 우승으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