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추억 낚으러 초록바다로
▲ 청보리밭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은 다정한 연인. | ||
지금이야 ‘참살이’ 곡식으로 대접 받지만 쌀 대신 어쩔 수 없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어야 했던 보리.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추억의 옛 사진을 들여다보는 듯한 아릿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 청보리가 지평선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고창. 그래서 고창 여행은 고향을 찾아가는 것처럼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겨우 보리밭을 두고 웬 호들갑이냐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보기 전에 예단하지는 마시길. 전북 고창군 공음면 일대에는 청보리밭이 마치 바다처럼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다. 5월 7일까지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는 학원관광농원만 해도 17만 평, 그 인근까지 합치면 30만 평이 훨씬 넘는다.
학원농원은 1960년대 초 ‘계획조성’된 대형 농원. 보리밭 주변으로는 장미, 카네이션 등을 기르는 화훼단지와 대추, 밤, 은행, 모과 등을 수확하는 과수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종합 농원으로 그 뛰어난 풍광 때문에 근래 들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보리밭은 ‘옷’을 세 번 바꿔 입는다. 아이의 볼처럼 연약한 싹이 이제 막 부푼 흙을 밀어냈을 때의 보리는 풋풋하고 싱그럽다. 청년의 기세처럼 이삭을 내밀고 바람에 일렁일 때의 보리는 고흐의 붓터치처럼 거칠다. 마지막으로 노인처럼 무르익어 누렇게 퇴색될 때의 보리는 들판에 불을 댄 듯 석양에 훨훨 타오른다.
지금은 시기적으로 첫 번째에 해당된다. 보리싹이 올라왔는데 겨우 발목을 덮을 정도. 축제가 끝날 무렵 보리는 청년기로 접어들 것이다. 축제가 끝나면 이윽고 황혼기. 6월쯤 보리 베기가 시작된다.
학원관광농원 근처는 완전한 평야지대가 아니라 약간의 굴곡이 있는 구릉지대다. 그래서 그런지 청보리밭은 멀리서 보면 마치 알프스의 초원 같다. 청보리밭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시원하게 한다. 초록은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색깔. 보리싹이 지닌 연초록빛은 마음의 피로도 풀어줄 정도로 싱그럽다.
이곳 청보리밭에는 사람들을 위한 산책로가 나 있다.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여유롭게 둘러보라고 일부러 ‘S’자와 ’U’자 등 곡선으로 길을 냈다. 각종 조형물도 설치했다. 재미있게 생긴 조각상들이 밭 한가운데 허수아비처럼 쭈뼛하게 서 있다. 모양은 제각각인데 사진 배경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 청보리밭 사이로 난 길이 구불구불 재미있다(맨 위). 아래는 벚꽃이 만발한 고창읍성. 고창읍성에서는 금요일마다 판소리체험마당을 열고 있다. 북을 치면서 장단을 배우는 어린이 체험객들. | ||
보리저장소는 이곳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구조물이다. 이곳은 축제기간 ‘청보리밭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5m 정도 높이밖에 되지 않는 건물을 두고 ‘솟아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시야를 가리는 어떤 인공적 구조물도 없다. 도시에서라면 수없이 많은 빌딩들이 시선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답답하게 막아섰을 것이다.
몽고인들의 시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고 한다. 우리로서는 1.5 정도만 되어도 아주 좋은 시력. 하지만 몽고인들은 보통 5.0 이상이다. 환경적 요인 때문이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을 평생 바라보며 살아온 그들과 아파트 숲에 갇힌 우리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몽골의 광활한 초원을 닮은 이곳에서라면 잃었던 시력도 되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한적하고 여유롭게 청보리밭을 둘러보려면 이른 오전이나 저녁 어스름에 들를 것을 권한다. 축제기간이라 한낮엔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만약 흥겨운 축제의 기분을 마음껏 느끼며 놀다갈 요량이라면 상관없다.
축제기간에 학원농원에서는 짚풀공예, 지게지기 등 농촌체험과 전통 농기구 전시, 시골장터 개최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주말과 휴일에는 주소연, 윤진철 명창의 ‘심청가’, ‘적벽가’ 완창 공연과 축제 참가자들을 위한 판소리 경연대회도 열린다. 도시 어린이를 위한 흙놀이 공간과 봄나물과 채소, 잡곡류를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장터도 선다.
푸른 청보리밭 산책만큼 편안한 산책로가 인근에 또 있다. 벚꽃이 만발한 고창읍성길.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축성한 성곽. ‘모양성’이라고도 부른다.
성의 둘레는 총 1684m. 높이 4~6m, 면적은 5만 172평이다. 갈고리처럼 생긴 옹성과 숨어 있는 치성, 왜적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만든 웅덩이와 장애물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다. 성벽을 따라 벚나무들이 빙 둘러쳤는데 요즘 꽃이 한창이다. 성 밖에는 철쭉과 진달래가 만발했다.
▲ 죽림리 일대의 고인돌군락.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 ||
고창읍성을 잘 둘러보는 방법은 첫 번째는 읍성을 따라 돌고 두 번째는 성내를 샅샅이 도는 것이다. 관아 건물들이야 드러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잘 볼 수 있지만 곳곳에 숨은 빼어난 비경은 놓치기 쉽다. 특히 하늘을 뒤덮는 노송과 빽빽하게 들어선 맹종죽은 운치를 더한다.
한편 고창읍성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판소리교실이 열린다. 장단도 배우고 북도 쳐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고인돌군락도 고창을 상징하는 여행지다. 고창 고인돌군락은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한자리에서 접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 고인돌 분포가 조밀하고 거석화된 고인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런 점들을 인정받아 고창 고인돌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고창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의 수는 2천여 기. 죽림리 공원과 상갑리 일대에 가장 밀집돼 있다. 우리가 흔히 봐왔던 북방식 탁자형 고인돌부터 덩그렇게 큰 돌덩이를 얹어놓은 남방식 바둑판형 고인돌 등 생긴 게 저마다 제각각이다. 고인돌공원 탐방코스는 모두 6개로 이뤄져 있다. 코스의 길이는 1코스부터 5코스까지가 죽림리에서 상갑리로 이어지는 1.8km. 6코스는 3코스로부터 1.1km 떨어진 고창읍 도산리 일대에 있다.
고인돌공원은 봄소풍 가기에 참 좋은 곳이다. 산자락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 주변으로는 넓은 잔디광장이 있고 산허리 고인돌 주변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공원 앞에는 움집 등 선사체험장이 마련돼 있다.
[여행 안내]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빠져나와 15번 국도를 타고 무장읍성 쪽으로 향한다. 무장면에 이르러 796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5분가량 달리면 학원농원.
★숙박: 학원농장에 숙박시설이 있지만 가족용 6실, 단체용 1실로 부족한 편이어서 다른 쪽도 미리 알아보는 것이 좋다. 선운사 관광단지에 ‘선운산관광호텔’(063-561-3377), ‘동백호텔’(063-562-1560) 등 숙박업소가 많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구시포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비치타운모텔’(063-562-5658)도 추천할 만하다.
★먹거리: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만 서식하는 뱀장어는 고창의 자랑거리. 선운사 앞 인천강에서 자라는 풍천장어는 스태미나 식품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선운사 입구에 풍천장어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연기식당’(063-562-1537), ‘가마골가든’(063-561-3155) 등이 유명하다.
★문의: 고창군청(http://www.gochang.go.kr) 063-560-2230, 학원농장(063-564-9897)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