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밀리는 ‘영남 충청’ 차기엔 한배 탈수도
▲ ‘세종시 원안 수정’ 논란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
사실 정치전문가들 가운데 현재의 정치적 구도로 차기 대선이 치러질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지금까지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는 친이-친박은 세종시법 문제로 그 갈등이 최정점에 이르면서 결국 각기 다른 대선 후보를 낼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세종시 논란 과정에서 자연스레 충청 기반 정치집단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흡수되고, 야당은 몇 차례의 개혁진통을 겪은 뒤 민주당-친노 진영으로 갈라지거나 또는 통합하는, ‘다자 간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게 현재 그려볼 수 있는 2012년 대선 예상도다. 세종시 논란이 차기 대선을 위한 정계개편론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배경과 그 가능성을 따라가 봤다.
“노무현의 저주인가.”
세종시 건설 논란으로 친이-친박 간 해묵은 갈등이 다시 터져 나오는 한나라당은 연일 어수선한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표현대로 ‘재미를 좀 본’ 세종시법이 결국 한나라당을 잡아먹을 것”이라며 불안해하고 있다.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욕먹는 일만 손댄다는 생각’을 하면서까지 세종시법 수정에 자신의 권력 후반기를 내놓을 정도로 ‘올인’을 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 또한 ‘지방선거 뒤 커밍아웃’의 전략마저 버리고 여당의 정책 수립 과정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세종시법의 승패 여부를 떠나 그 후폭풍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돼 부담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런 양측의 ‘고집’이 내년 1~2월 세종시 수정안 도출 때까지 그대로 이어질 경우 최악의 표결 대결 상황도 예상된다.
이때 친박 진영 60여 석의 협조 없이 수정안 가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여당 내 반란표가 야당과 결합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전개된다면 이 대통령의 정국 주도력은 급속하게 약화돼 분당 수순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지난 2001년 9월 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자민련이 한나라당의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져 김대중 정권에 큰 타격을 줬고, 결국 그것이 DJP 공조의 파국을 이끄는 단초가 된 바 있다).
그런데 당내에서는 아직까지 왜 세종시가 개헌론과 4대강 사업 등 더 큰 현안이 있는데도 여권 최대의 블랙홀로 등장했는지, 의아해하거나 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대통령이 아무리 ‘소신’에서 나온 결심이라고 해도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해괴한 정무 판단’을 한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겠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전략 관계자는 “세종시 문제는 처음부터 청와대 정책라인의 핵심인 박재완 국정기획수석이 총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그는 최근에도 일부 기자를 만나 ‘세종시를 기업과 대학, 의료가 어우러진 자족도시로 만들겠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정무라인이 영향력을 미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정책적 판단이 정무적 부담으로 전가되는 악순환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실 세종시 문제는 이 대통령이 처음 논란을 야기할 때 ‘원안 수정’이라는 정책적 대의명분만 너무 앞세우다 보니 정무적 백업(뒷받침)이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결국 그 후유증으로 지금의 세종시 논란은 정책대결이 아닌 정파적 이해관계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종시 논란이 친이-친박 간 갈등으로 전이되면서 여당 일각에서는 “양측의 타협점 도출은 사실상 힘들어졌다”라는 부정적 반응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내년 초까지 대안을 마련해 여론몰이를 할 경우 원안 수정에 대한 실마리를 마련할 수도 있다. 청와대도 그것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입장에서 보면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인다. 박 전 대표로서는 이 대통령이 대안을 제시하기도 전에 마지막 타협의 퇴로마저 차단한 채 ‘원안+알파’라고 대못을 이미 박아놓아 버렸다. 그래서 친박 진영 온건파 내에서는 “이 대통령이 국민에게 엎드려서 사과를 하고 청와대가 여론몰이를 하면 국민 여론이 어찌 될지 모른다. 그런 상황이 오면 박 전 대표가 곤란해질 수 있다”라는 걱정스런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는 왜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고 옥쇄작전을 펼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친박 진영에서는 여권 주류의 ‘음모론’을 제기한다. 이성헌 의원은 이번 세종시 논란의 이면에는 뭔가 치밀한 복선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정책적 판단 범위를 넘어선 정치적 분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의원은 이에 대해 “이 사안을 잘 보라. 박 전 대표가 선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해 어떤 안을 바꾸자거나, 서둘러 진행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나? 없다. 이 사안은 전적으로 행정부와 청와대가 중심이 돼 분위기를 끌고 가고 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지금까지 진행된 양상을 볼 때, (이 대통령이) 단순하게 한번 시도하고 되면 되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치밀하게 관철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의원은 “(정운찬 총리의 수정 발언 전에) 실제로 청와대 내부에서 박재완 수석을 포함해 몇몇 수석이 이 문제로 언론도 만나고 각계각층 인사들을 만나 지속적으로 작업한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이 대통령이 세종시 논란이 불거지기 전에 치밀하게 사전 정지작업을 해왔음을 뜻하는 말. 그리고 그 노림수의 핵심은 익히 알려진 대로 ‘박근혜 고사작전’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청와대의 기대대로 세종시 수정 대안이 여론의 지지를 얻는다면 원안에 정치적 생명을 걸다시피 한 박 전 대표는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이어져 그의 힘이 계속 빠질 것이라는 게 주류 측의 기대인 듯하다.
▲ 민주당과 친노 측이 정체성 논란 등을 거치며 각개약진을 할 경우 차기 대선구도는 다자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시민주권모임 발족식에 참석한 정세균 민주당 대표, 이해찬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왼쪽부터).유장훈 기자 | ||
사실 친박 진영이 이렇게 퇴로를 차단한 채 극력 저항하는 것은 이번 세종시 문제를 친이 진영의 박근혜 고사작전 연장선에서뿐만 아니라 차기 대선의 핵심 이슈로까지 확장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강경하게 대응해야 차기 대선 구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여의도 주변에서 ‘한나라당 박 전 대표의 대권가도 독주와 야권의 지리멸렬’이라는 현재의 정치구도가 아무런 변화 없이 2012년 대선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정치 전문가는 거의 없다. 다만 누가 어떤 계기로 현재의 정치판을 먼저 바꾸느냐의 문제였다. 친박 진영에서는 세종시 문제가 바로 기존 정치판을 깨는 최초의 정계개편 무대가 될 것으로 판단, 퇴로 없는 강경대응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은 내가 만든 당’이라는 주인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분당까지는 안 될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이 끝까지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을 경우 어쩔 수 없이 탈당한다는 인상을 주면서 한나라당을 떠나 새로운 집을 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때의 창당은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을 때와는 다르다. 당시는 그가 ‘이회창’이라는 그늘에 가려 고생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차기 권력 창출이 가장 유력시되는 그야말로 제2의 산 권력이다. 당연히 그때와는 달리 막강한 세가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가능성은 이번 세종시 문제가 촉발되면서 더욱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사실 이번 세종시 논란에서 충청에 기반을 둔 자유선진당의 이회창 총재는 존재 여부가 불투명할 정도로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라는 강력한 블랙홀로 자유선진당 의원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시 문제로 박 전 대표와 한 묶음이 될 수밖에 없는 자유선진당 의원들로서는 유사시 이회창이라는 ‘허수아비’보다는 차기가 보장되는 박 전 대표의 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자유선진당 일각에서 “극적 돌파구 없이는 다음 총선에서 선진당이 설 땅이 없을 것”이란 자조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세종시 문제를 겪으면서 결국 그들이 의지해야 할 산은 ‘박근혜’라는, 냉혹한 정치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들이다. 세종시 문제가 차기 대선의 핵심 이슈가 될수록 그들에게 박 전 대표는 중요한 ‘대안’이 돼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박 전 대표의 폭발력 때문에 김종인 전 민주당 의원은 최근 “박 전 대표는 이번 세종시 논란으로 최소한 의원 80여 명(친박 60여 명에 자유선진당 17명)의 지분을 확보했다 평가할 수 있다”라고까지 평하고 있다. 이는 민주당의 의석(87석)에 육박하는 막강한 정치세력이다. 여기에 세종시 문제와 직결돼 있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충청지역 의원들마저 ‘박근혜 당’에 합류할 경우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친박 진영이 이탈할 경우 100여석으로 줄어들 가능성을 상정해) 의석수와도 비견되는 울트라 정당을 창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박 전 대표의 차기 대선을 위한 세종시 포석을 친이 그룹도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친이계가 세종시 문제에 대해 ‘박근혜 책임론’까지 들먹이며 막장 대결을 유도하는 것도 이런 기류에 기반하고 있다. 세종시 문제로 불거진 친이 그룹의 ‘드잡이’식 강경 기류는 더 이상 친박과의 ‘화해’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웅변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맞장 대응은 친이 진영도 분당을 전제로 차기 대선에서 독자후보를 내겠다는 의지를 강도 높게 표현하고 있는 것과 맥이 닿는다. 여기에 민주당과 친노 진영이 개혁 정체성 논란을 거듭하면서 통합 혹은 분열로 각각의 후보를 낼 경우 차기 대선은 3~4파전의 다자 대결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세종시 문제로 촉발된 차기 대선 구도의 핵심은 박 전 대표가 친이 진영에 맞서 ‘충청+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엮어내는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또 '위화도 회군' 할까
파워 과시한 뒤에 차기보장 노림수?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번 세종시 문제도 결국 마주보는 기관차 가운데 한 대가 충돌 직전 정차하면서 그 막을 내릴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이번 사태를 통해 박근혜 전 대표가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분석이 깔려 있다. 친이계의 한 의원은 이번 세종시 문제의 본질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이 ‘순진하게’ 박 전 대표에게 충분하게 설명도 하지 않은 채 협력을 기대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꼴이다. 박 전 대표로서는 당연히 자신의 지지 세력을 위해서라도 처음에는 열이 받은 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진보세력에 권력을 또 다시 내줄 수 없다는 양측의 교감은 결국 두 사람 사이의 비선 라인 작동으로 이어져 막판에 극적인 타협안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가 세종시법 논란 초반에 강경대응을 주도하는 이면에는 자신의 파워를 과시해 여권 내 친이 진영으로부터도 이번 기회에 차기를 확실하게 보장받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종의 몸값 높이기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친박 진영에서는 ‘지난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박 전 대표는 패배를 각오하면서도 정도를 걸었던 사람’이라며 정략적 접근에 대해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박 전 대표로서는 한나라당이라는 가장 확실한 집권 발판을 스스로 걷어차고 풍찬노숙의 신당 창당 과정을 밟기에는 그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을 지난 2002년 한나라당 탈당에서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 내년 1~2월 여권 내부에서 수정안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질 경우 국정혼란 방지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세종시법 수정에 전격 동의해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박 전 대표는 또 한 번 ‘미이어법 처리 뒤의 지지율 하락’과 같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박 전 대표는 지금 신당 창당이냐 원칙 훼손이냐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