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신당보다 유 ‘하나’가 무서워
▲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국민참여당 입당으로 야권 분화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민주당과 참여당의 지방선거 주도권 다툼도 불가피해졌다. | ||
“깨어있는 시민들이 스스로 참여하는 정당의 당원이고 싶습니다. 다른 길이 없기에 이 길을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더 많은 행동하는 양심들의 참여를 호소합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미리 준비한 ‘입당의 변(辯)’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2008년 1월 “‘진보적 가치’가 숨 쉴 공간이 너무 좁다”며 대통합민주신당을 박차고 나간 지 1년 10개월여 만에 ‘정당인’으로 복귀하는 순간이었지만, 표정은 시종 경직돼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많은 기자분들과 카메라 앞에 서다보니…”라고 해명했지만 ‘정치선전의 대가’라는 그가 기자와 카메라를 낯설어할 리는 없다. 무엇이 그를 불편하게 했던 것일까.
#2. 같은 시각 여의도 국회의사당 기자회견장. 민주당 우상호 대변인이 현안 브리핑을 위해 연단에 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훈으로 보나 경남 양산의 선거결과로 보나 국민들은 분열보다는 통합을 명령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민주당이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겸허히 돌아봐야겠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분열’이 용인돼야 하는가란 의문이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국민참여당(참여당) 입당으로 야권 분화는 본격화할 전망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야권 연대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도 불가피해졌다. 민주당이 직접적인 유감표명에 나선 것도 상황을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유 전 장관 본인도 독한 마음을 품었다. 그는 친노 진영 좌장인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에 대해 “살다보면 서로 믿고 존경하는 사이라도 판단이 좀 다를 때가 있다. 그 분들은 제가 조금 나중에 입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마이웨이’ 행보를 분명히 했다. 또 ‘민주당의 미래’를 놓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격한 토론을 벌였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대통령님이 말려도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겠다’고 말씀 드릴 것”이라고도 했다.
왜 유 전 장관의 신당행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야권 내 차기 대선주자 가운데 선두를 달리는 그의 상품성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간 민주당은 ‘친노신당’(참여당)에 대해 “극히 소수의 친노 인사들만 참여해 별 영향이 없을 것”(박지원 정책위의장)이라며 성공 가능성을 낮춰봤던 게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의 양팔인 안희정 최고위원과 이광재 의원이 모두 민주당적을 갖고 있고, 이해찬 전 총리도 ‘민주당 중심’에 방점을 찍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 분석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관측은 ‘유시민이 신당에 가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벌써부터 의미있는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유시민 효과’가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당원 증가 추이가 눈에 띈다. 11월 13일 오전 11시 현재 1만 2371명인 참여당 당원은 유 전 장관 입당 전인 9일까지만 해도 6900여 명에 불과했다. 입당 이후 나흘 사이에 신규 당원이 거의 두 배나 불어난 것. 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에 합류한 당원들도 일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당 관계자는 “유 전 장관 입당 이전 평소 당원 증가속도와 비교해봤을 때 4∼5배 더 빠른 속도”라고 말했다.
돈이 덜 드는 ‘인터넷 정당’을 표방한 만큼 웹 공간에서의 성장세는 더욱 두드러진다. 참여당 측에 따르면, 평소 일일 방문자 수가 평균 3000명 선이었던 것이 유 전 장관 입당 당일인 10일 1만 5000여 명대로 5배가 늘었다는 것. 덕분에 웹사이트 방문자순위 평가업체인 랭키닷컴의 ‘정당별 방문자 수 순위’에서 한나라당, 민주당 등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고 참여당 관계자는 전했다.
무엇보다 여론조사에서 벌써부터 민주당의 존재감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 11월 9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ARS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층 가운데 국민참여당에 대한 “지지의향이 있다”(62.7%)는 응답이 “없다”(21.2%)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나 민주당 지지세가 언제든 참여당으로 전이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KSOI 관계자는 “유 전 장관의 입당일은 10일이었지만 앞서 9일 입당 소식이 보도됐기 때문에 ‘유시민 효과’가 부분적으로 반영됐을 것”이라며 유 전 장관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민주당은 일단 ‘선의의 무시’(benign neglect) 전략으로 가닥을 잡는 모습이다. 괜한 논란으로 참여당의 존재감을 키워줄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또 후일 선거연대가 불가피한 만큼 서로 감정 상할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점도 고려됐다.
이강래 원내대표는 지난 11월 11일 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유 전 장관 입당과 관련, “예정되었던 일이기 때문에 크게 민감하게 보지 않는다”며 “막상 선거전에 돌입하면 군소정당이 갖는 의미는 상실되고 존재의 의미 자체를 찾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이 같은 자신감 저변에는 ‘안산 학습효과’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지난 10월 28일 안산 상록을 재선거에서 민주당 김영환 후보가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 군소야당 연합후보였던 임종인 후보와 단일화 없이도 한나라당 후보에 압승을 거뒀던 일을 가리킨다. 굳이 ‘통 큰 양보’를 하지 않더라도 ‘반 한나라당’ 지지세는 선거 막판 민주당 우산 아래 결집할 것이란 낙관론이다.
그렇다고 전혀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참여당이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가 있는 만큼 연합 주도권을 행사할 것”(천호선 참여당 준비단장)이라며 ‘유시민 서울시장론’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유 전 장관 본인은 입당식에서 “(지방) 선거계획이 아직은 없다”고 말을 아꼈지만, 주변에선 “연말쯤 서울로 주소지를 옮길 예정”이라며 서울시장 출마를 공식화하는 분위기다.
민주당이 만약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인 유 전 장관에 버금가는 인물을 세우지 못할 경우, 후보직을 양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서울시장·경기지사 선거는 ‘지방선거의 꽃’이라고 할 만큼 상징성이 크다”며 “민주당이 두 곳의 후보직을 참여당 등에 양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참여당은 여세를 몰아 추가적인 ‘몸집 불리기’에 나서면서 향후 선거연대 논의에서 ‘을’이 아닌, ‘갑’의 위치에 서겠다는 복안이다. 한 핵심관계자는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거친 인사들의 입당이 예정돼 있다”며 “(뚜껑을 열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정치컨설팅 포스커뮤니케이션 이경헌 대표는 “참여당이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확보한다면 민주당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친노 진영 내부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만큼 신당의 동력이 지방선거 전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한다”고 말했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