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후보, “오로지 ‘학생에게 충성한다’는 자세로 일할 것”
- “교육감 선거…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정직·깨끗한 정책경쟁 선거 돼야”
- ‘학생이 행복한 학교’위해 고난 맞서 올곧게 나아가는 ‘작은 거인’
- 가장 든든한 지지자이자 동반자는 ‘사랑하는 아내 윤정숙’
[대구=일요신문] 최창현 기자 = “교육만은 정치나 외풍으로부터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홍덕률 대구시교육감 예비후보에게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확고한 신념이있다. 그는 교육감에 나서면서도 “교육현장 만은 이념이나, 진영의 포로가 되거나 정파싸움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념 하나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홍 후보는 “학생을 지키는 것, 교육의 본질이 학교와 교실에서 꽃피도록 하는 것, 교육현장 만큼은 다양한 생각과 이해관계가 잘 조율되고 소통돼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로지 ‘학생에게 충성한다’는 자세로 일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지난달 28일 대구대학교 총장직을 사퇴한 그는 이어 지난 5일 대구교육감 출마를 선언했다. 이날 대구시 중구에 있는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대구시교육감 출마 기자회견을 갖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진영적 사고와 접근을 거부한다”라고 출마의 변을 밝히며, 공식 선언했다.
그는 ‘학생이 행복한 학교’, ‘선생님이 존경받는 대구’, ‘대구교육의 변화와 혁신’을 키워드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자유롭고 싶고, 오로지 학생의 행복과 교육만을 생각하겠다“고 다짐했다.
‘일요신문’은 그에게 자신이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고, 교육감 출마의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얌전하고 숫기 없는 소년 ‘홍덕률’
홍덕률은 1957년 12월 인천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한국전쟁 때 고향인 황해도 연안을 떠나 월남해 인천에 정착해서 5남 2녀를 슬하에 두었다. 그중 그는 넷째 아들이다. 어린 시절 숫기 없는 얌전하고 조용한 소년이었다.
”중학생 시절, 부친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에는,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졌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 가난·탈선 유혹에서 벗어나
”함께 신문을 배달하는 한두 해 선배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탈선의 경계선에도 서 보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한 시간 이었습니다“
이런 그를 붙들어 주고 지탱해 준 것은 역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어머니는 비록 배우지는 못하셨지만, 지혜롭고 현명한 분이었다. 전형적인 현모양처 상이었다. 특히 자녀를 올곧게 키우는 일에는 온 정성을 다했다. 또 하나의 힘은 책이었다. 형들이 읽던 교양서, 철학서들을 읽으면서 삶에 대해서, 가치 있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던 것이 그를 붙들어 주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책. 사춘기 시절, 그를 탈선의 유혹에서 지켜준 힘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 간 적도 있었습니다. 형과 누나들은 대학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었죠“
고1 에버그린 동아리 친구들과(윗줄 왼쪽 첫 번째)(사진=홍덕률 후보 선거캠프 제공)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그는 대단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교육기회만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도 그때였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어느 날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불렀는데, ”고등학교 전 학년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상업고등학교를 추천했다“고 전했다. 가정형편을 잘 아시는 담임선생님이었기에 생각해서 한 말씀이었다고...
학비가 싼 국립대가 아니면 대학을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울대학교에 가자’ 라고 굳게 결심한 그는 제물포고등학교에서 문과 1등으로 졸업했다. 이어 서울대에 합격했다. 대학 진학은 형제들 중 그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서울대였던 것. 그는 당시를 ”온 가족이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동네 이웃들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많이 축하해 주었습니다“라고 회상한다.
- 홍덕률, ‘소외계층’ 편에 서다
”1학년은 진로를 놓고 방황하고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특별한 진로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었기에, 미래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모두 대학 1학년 때로 늦춰졌던 시절 이었죠“
그는 많은 번민 끝에 법학과와 경제학과를 버리고 사회학과를 택했다. 대학 1학년 시절, 빠져서 읽었던 교양서적들, 철학서들, 인문학 서적들이 다룬 많은 주제들을 사회학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 홍덕률은 당시 사회문제에도 눈을 떴다. 농촌봉사활동, 야학,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활동들에도 참여했다. 소외계층의 삶과 사회통합 방안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1980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1983년에는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1985년에 석사 졸업, 85년 박사과정에 입학한다.
1985년, 박사과정에 입학한 해에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조교로 일했다. 이 대학 조교는 정식 공무원이다. 그해 9월, 아내 윤정숙(60)과 결혼했다. 1979년, 대학 3학년 때 만났으니 연애 7년만에 결혼한 셈이었다. 아내 윤정숙은 이후 지금까지 홍덕률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이자 동반자이다. 현재는 경북과학대학 사회복지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대구·대구대학교에 둥지 틀다
1987년 12월. 대구대가 사회학과 교수를 초빙한다는 공고를 냈다. 초빙 분야는 사회계층과 산업사회학 분야. 바로 그의 전공인 것. 망설였다. 대구는 그에게 매우 생소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의 대구행 결심을 이끈 이는 역시 아내였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하던 아내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대구대는 사회복지학과 특수교육으로 유명한 대학이다. 설립자는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특수교육과 사회복지를 개척한 선각자이고, 설립자의 아들인 이태영 총장 역시 특수교육 분야에서 존경받는 선구자다. 대구대에서 우리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 보자“라고...
그는 ”대구대의 건학정신과 교육철학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어렵게 자란 나의 성장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고, 특히 소외계층의 삶과 사회정의를 세우는데 기여하고 싶어 했던 나의 꿈도 작용했습니다“라고 말한다.
1988년 3월, 그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대구와 인연을 맺었다. 아내와 둘이 1톤 트럭에 짐을 싣고 대구로 향했다. 대구와 대구대에서의 그의 30년 넘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미국 연수(LA) 시절, 가족과 함께(1998년 7월)(사진=홍덕률 후보 선거캠프 제공)
이듬해 그는 아들도 하나 갖게 됐다. 너무 허약해서 임신과 출산이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받았던 아내가 대구에 와 아이를 임신했고, 순산까지 할 수 있었다. 하늘이 준 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대구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경북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 후 지금까지 한 아이의 아버지로, 학부모로, 지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또 2만명의 학생(대구대)과 4000여명의 학생(대구사이버대)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총장으로 대구에서 뿌리를 내렸다.
- 학생이 희망이다
”학생들은 진취적이고 밝았다. 지연과 학연이 뿌리 깊게 작용하는 폐쇄적인 도시(대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가 만난 학생들은 개방적이고 정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고 확신했다. 그럴수록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늘었고 정성을 들였다. 그가 학생들에게 ‘이익을 쫓는 삶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학생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하는 다짐과 희망의 말이었다.
- 대구대 민주화, 자신을 걸다
1993년 9월, 그는 부도덕한 사학재단에 의해 재임용탈락, 해직된다. 설립자인 이태영 총장은 병환으로 치료 차 미국에 가 있었고, 그 유족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재단 비리와 학사 비리, 독선과 전횡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시 그는 교수협의회의 총무간사였다.
재임용탈락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1993년 8월, 그는 재단의 회유와 압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재단의 해임 압박과 회유에 타협하기보다 해임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그 순간 동료교수들과 학생들은 부당 해직에 반대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1994년 9월 복직될 때까지 해직교수 생활 1년 동안 그에게 200여명의 동료교수들이 1만원씩 모아 매달 200만원씩의 생활비를 대주었습니다”
결국 교육부는 부도덕한 당시 재단 이사들을 해임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했다. 이에 맞춰 그도 복직하게 됐다. 해직된 지 꼭 1년 뒤였다. 그는 “번민을 이기고 소신과 학자적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붙들어 준 이는 누가 뭐래도 사랑하는 아내였다”고 말한다.
- 2009년 11월, 대구대 10대 총장이 되다
그는 2009년 9월. 총장선거에 나섰다. 후배 교수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던 것. 대학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재단정상화 과제를 앞두고 있어서 대학을 구해낼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지역 출신이 아니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사실 피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후배 교수들의 요구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죠”... 그는 결심했다. 대구대와 지역사회에서 받은 은혜와 성원을 돌려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어서 위험이 따랐지만, 대구대를 구하기 위해 나서 보기로 마음먹었다.
결과는 당선이었다. 교수와 직원이 직접 투표하는 직선제 방식이었다. 언론들은 ‘이변’, ‘기적’, ‘사건’이라고 써내려갔다. 보수도시 대구에서 지연도 학연도 없는 52세의 개혁성향 사회학자가 당선되어서 였다.
물론 그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그는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대학총장 선거에서 흔하게 보였던 밥선거, 술선거, 골프선거, 보직팔이 선거 등을 하지 않고 그야말로 교과서식으로 깨끗하게 선거에 임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교육자로서 양심에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 ‘학생이 행복한 대학’ 만들기
“총장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제적 형편 때문에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이 없도록 하는 일, 진로 때문에 의기소침 하는 학생이 없도록 하는 일, 학생이 미래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도록 교육내용과 교육방법 등을 혁신하는 일 등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재단이든, 총장이든, 교수든, 행정이든,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학생이 늘 을의 입장인 한국의 대학문화를 바꿔보기로 했다. 그것을 한마디로 그는 ‘학생이 행복한 대학’이라고 표현했다.
- 교육자로서 30년
“교육자로 대구에서만 꼭 30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22년은 평교수로, 8년은 총장으로, 그 중의 4년은 두 대학의 총장을 겸직했습니다”
그는 교육자로서 오로지 학생을 위해, 우리 사회의 미래세대를 위해 열정적으로 살았다. 대학이 외부의 불의한 세력이나 정치에 의해 위협받지 못하도록 지켜내면서 오로지 학생을 바르게 키워내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총장 재임 당시 의미있는 성과들은 ‘섬김과 소통의 리더십’으로 가능했다. 낮은 자세에서 구성원들과 소통했고, 지역사회와도 소통했다. 대학구성원의 역량과 지역사회의 성원을 모아내는 것이 총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학생과 교수를 격려하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그들이 즐겁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려고 애썼다.
2011 국제교육리더포럼(2011년 10월), 대만국립 칭화대(앞줄 왼쪽 세 번째)(사진=홍덕률 후보 선거캠프 제공)
학생과 대학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만나고 누구의 지혜라도 빌렸다. 거기엔 여와 야가 없었으며, 진보와 보수, 중앙과 지역도 없었다. 호남도 강원도도 외국도 달려갔다. 그에게는 오로지 학생과 교육정의가 중요했다. 그 외는 모두 부수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이었다.
- 행복한 학교 위해 나아가는 ‘작은 거인’
“교육감선거는 교육감선거다워야 합니다. 정치인들의 선거처럼 세를 과시하거나, 권모술수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고 깨끗한 정책경쟁 선거가 되어야 합니다”
(사진=일요신문 DB)
그는 오늘도 지역의 초중고 학생들을 만나는 일정들 속에 있다. 학부모와 교사들과의 만남도 계속 이어 가고 있다. 학교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최대한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 학원, 그리고 대학입시 압박감에 힘들어 하는 학생들의 하소연을 들을 때면 그는 함께 눈물을 글썽인다. 우리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건져내 달라는 학모들의 간절한 호소를 들을 때면 그는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다시 붙들고 일어선다.
“구멍 난 둑을 막아 마을을 홍수에서 구한 네덜란드의 한 소년처럼, 한 개인의 힘은 매우 미약하지만 그 한사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왔습니다. 고난과 위기가 자신을 키웠고, 험한 시련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면서 단련되었고 사회적 책임감도 함께 커져왔습니다”
그가 그렇게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해온 30년 세월 동안, 그는 어느새 얌전한 소년에서 교육계의 작은 거인이 돼 있다. 지금 그는 대구의 나아가 대한민국의 교육을 바로잡겠다는 의지와 책임감으로 불타고 있다.
‘학생이 행복한 학교’ ‘선생님이 존경받는 대구’ ‘학부모가 안심하고 자녀를 믿고 보낼 수 있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교욱신념이다.
이를 위해 그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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