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에서 시간이 멈춘 마을
▲ 영조 때 지어진 미내다리. (작은사진 위부터)우리나라 유일의 한옥교회인 북옥감리교회. 아래는 50~60년 전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북옥리. 맨 아래는 중앙리에 자리한 일본식 건물로 미용실로 이용되고 있다. | ||
화려했던 시절은 가고
강경은 젓갈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의 강경만 보자면 이곳에 왜 젓갈시장이 섰는지조차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포구가 있다지만 유명무실. 배 한 척 드나들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19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강경포구는 전국 각지에서 드나드는 배들로 분주했고, 수산물의 거래가 왕성했다. 서해에서 잡은 고기는 모두 강경에 모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 많은 고기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자연스레 염장법이 발달했고, 젓갈 또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강경의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강경은 금강하구와 가깝다. 또한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자리하고 있다. 금강 너머 서쪽으로 충남 부여, 북쪽으로 공주, 동쪽으로 논산이 이웃하며, 남쪽으로는 전북 익산과 경계에 있다.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해상과 육상의 요지가 바로 강경인 것이다.
그러나 강경의 영광은 군산항 개항(1889년)과 장항선 개통(1931년) 등 해상과 육상의 대체 운송로가 생기면서 퇴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금강하구둑 건설과 함께 오롯이 과거의 기억으로 남게 됐다. 1990년 금강하구둑이 완성된 후 배들의 왕래가 끊기면서 포구는 기능을 상실했다. 마을의 어민들마저도 포구에서 떠났다. 바닷물이 제집처럼 드나들던 강이 둑에 갇히면서 민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가득 올라오던 온갖 고기는 양뿐만 아니라 종류도 급감했다. 더 이상 강은 어민들의 생계를 보장해주지 못했다. 이후 포구와 시장은 자연스레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젓갈시장만은 용케도 명맥을 유지하더니 근 10년 사이 점점 몸집을 불리면서 강경을 대표하는 명물로 자리 잡았다. 포구가 있었던 태평동 일대에 대형 젓갈상회들이 즐비하다. 강경젓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읍내에서 황산대교 쪽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젓갈전시관을 찾으면 된다. 유람선 모양을 하고 있다. 총 4층으로 이루어졌는데 1층은 젓갈유통센터와 정보검색코너, 2층은 젓갈전시코너, 3층은 젓갈체험학습실, 4층은 전망대 겸 카페테리아다.
전시관 맞은편에 등대전망대가 따로 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강경읍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황산대교 방면으로 등대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죽림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인조 4년(1626년) 창건된 서원으로 조광조·이황·이이·성혼·김장생·송시열 등 6인의 제사를 모신다. 서원 위쪽 언덕에는 임리정이라는 건물이 있다. 김장생이 서원 건축시에 건립한 것으로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 옥녀봉 아래 아주 오래된 가게. 주로 동네 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한다. | ||
포구가 발달한 강경은 일제강점기 때 수탈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일제는 쌀 반출을 위해 1924년 10월에 갑문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일제의 흔적은 강경 곳곳에 남아 있다. 강경에서 일본식 건물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상당수 공공기관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일본식으로 지어졌다. 이러한 건물들을 찾아 읍내를 누비다보면 마치 과거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구 강경노동조합, 남일당한약방, 한일은행, 중앙초등학교, 강경상고 관사 등이 일본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물이다.
구 강경노동조합은 염천리에 있다. 2007년 4월 30일 등록문화재 323호로 지정되었다. 1925년 강경노동조합 초대 조합장이던 정흥섭이 지은 건물로 원래 2층이었던 것이 현재 일본식 목조 양식의 1층만 남아 있다.
중앙리에는 남일당한약방과 중앙초등학교가 있다. 남일당한약방은 1923년 세워진 건물이다. 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10호로 지정됐다. 2층으로 지어진 이 목조건물은 전형적인 일본가옥 형태를 띤다. 1973년까지 한약방으로 운영되었다. 중앙초등학교는 강경에서 가장 먼저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 1937년 준공됐다.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제 60호로 지정됐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물은 보존상태가 다른 건물들에 비해 매우 양호한 편이다.
중앙초등학교에서 강경천 방향으로 나가다보면 남교리에 강경상고가 있는데 이곳에 1931년 지어진 관사가 있다. 2007년 4월 30일 등록문화재 322호로 지정된 건물로 일본 목조 형식에 벽돌로 바꾸어 지은 건물이다.
서창리에는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이 있다. 2007년 4월 30일 등록문화재 324호로 지정되었다. 1913년 지은 붉은 벽돌 건물로 내·외부 모양이 무척 세련됐다. 강경의 이들 건축물들은 지난해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해 서서히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지난 4월 말 한일은행 지점의 공사가 완료됐고, 강경상고 관사도 얼마 전 작업을 끝냈다. 현재는 노동조합건물에 대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들 건물을 보전하는 것은 아픈 시대의 유물이라 해서 지우기보다는, 남겨두고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 강경젓갈전시관. | ||
일제강점기 때 지은 대부분의 건물들이 우리의 전통 건축양식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옥을 고집한 교회가 있어 눈길을 끈다. 북옥리 옥녀봉 자락에 자리한 감리교회다. 현재 남아 있는 국내 유일의 개신교 한옥 교회로, 1923년 이인법 목사가 설계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곳은 교회로 운영되었으나 올해 초 교회가 인근 활터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비어 있다. 2002년 9월 13일 등록문화재 42호로 지정됐다. 한옥 기와지붕 위에 세워진 십자가가 무척 인상적이다.
교회 위쪽의 옥녀봉은 강경 최고의 전망대이자 쉼터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꼭대기에 봉화대 하나가 설치돼 있다. 주변에는 벤치가 여러 개 놓여 있다. 발 아래로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오른쪽으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왼쪽과 뒤쪽으로는 강경읍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옥녀봉 바로 밑에는 50년 가까이 된 가게가 하나 있다. 75세의 며느리가 109세의 시어머니를 모시며 장사하는 가게다. 재미있는 사실은 시어머니 이름이 옥녀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며느리도 비슷한 이름인 옥례다.
대전에서 25세에 시집온 며느리는 가게를 찾은 낯선 손님에게 30년 전에야 수도가 설치돼 물고생에서 벗어난 사연하며, 반세기 동안 강경이 변화한 모습들에 대해 조근조근 풀어놓길 즐긴다. 옥녀봉 공원화 사업으로 주변 집들이 모두 철거되면서 말벗들을 떠나보낸 까닭이다.
한편, 강경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때에는 미내다리도 찾아보길 권한다. 채운면 신하천 둑방에 있다. 영조 7년(1731년)에 세운 이 다리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다. 일제강점기 때 하천제방을 쌓으면서 다리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용문양의 조각이 눈에 띈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