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맞은 영상의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빵행’
말레이시아계 아버지와 수마트라 지역의 미낭카바우족 어머니 사이에서 1981년에 태어난 나즈릴 이르함은 틴에이저 시절 ‘실버’ ‘콜레스테롤’ 같은 스쿨 밴드를 거쳐 1997년 ‘토피’라는 밴드에 보컬로 합류한다. 키보디스트인 안디카가 결성한 밴드 ‘토피’는 주로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 넘버들을 연주하던 카피 밴드였다. 이후 밴드는 멤버 교체를 거쳐 2000년에 ‘피터팬’으로 거듭났고, 거리 버스킹과 카페 공연을 하며 꿈을 키워나갔다. 이 시기 레퍼토리는 너바나, 펄잼, U2, 콜드플레이 등의 음악이었다.
이때 그들의 연주를 우연히 목격한 사람은 프로듀서인 노에이였다. 그의 도움으로 2002년에 컴필레이션 앨범을 내며 성공을 거둔 피터팬은 2003년에 첫 정규 앨범을 냈고 2004년에 두 번째 앨범을 낸다. 이 앨범은 인도네시아 역대 앨범 판매 3위에 오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나즈릴 이르함은 ‘아리엘’이라는 예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록 보컬로 스타덤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아리엘은 2010년 불의의 일격을 당한다. 사적으로 찍었던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면서 삽시간에 인터넷을 뒤덮은 것. 노트북을 도난당하면서 그 안에 있던 클립들이 불법적으로 나돌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아리엘은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게 된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바로 2008년에 만들어진 ‘안티 포르노 법’ 때문이었다. 몇 년에 걸친 논란 끝에 통과한 극도로 보수적인 이 법은 ‘포르노액션’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며 외설적인 행동을 단속했다. 이 법에 의하면 공공장소에서 키스를 하거나 배꼽티를 입거나 비키니를 입고 선탠을 해도 모두 범법자가 되었고, 아리엘처럼 포르노그래피에 관련된 인물은 여지없었다.
이 법이 만들어진 배경엔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이슬람 과격파의 압력이 있었고, 아리엘은 ‘안티 포르노 법’에 의해 처벌 받는 첫 셀러브리티였다. 그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어떤 동의 절차도 거치지 않은 섹스 동영상 유출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은 엄격했다. 동영상이 퍼지는 상황에서 그 주인공인 아리엘에 그 확산을 막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며 검찰은 기소했고, 그 어떤 반성의 기색도 없다고 비난했다. 이에 트위터엔 ‘freeariel’(아리엘을 석방하라)이라는 해시태그가 여기저기 달렸고 법원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완강한 보수파들은 아리엘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며 반대 집회를 열었다. 아리엘의 비디오 스캔들은 당시 인도네시아의 갈등 구조를 축약해 보여주는 사례였던 셈이다.
아리엘에 대한 엄격한 법 적용은 실제로 그의 죄를 묻기보다는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공권력의 시위에 가까웠다. 저널에서 ‘아리엘 피터포르노 테이프 사건’이라 불렀던 이 일 이후 경찰은 불시에 PC방이나 학교에 들이닥쳐 단속을 벌였다. 10대들의 모바일 폰에 아리엘의 섹스 동영상이 들어 있는지 검사한다는 이유였다. 표면적으로는 유해 요소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건전한 목적이었지만, 경찰의 이런 무자비한 행동엔 당연히 인권을 침해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정보통신부 장관인 티파툴 셈비링은 “인터넷이 국가를 파괴할 수 있다”며 강경하게 맞섰다.
아리엘은 2012년 7월, 1년 6개월 동안 복역한 후 2년의 형기를 남기고 모범수로 출감했다. 그는 흩어졌던 밴드를 재결성했고, 피터팬에서 ‘노아’라는 개명한 후 활동을 재개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걸까? 그들의 활동은 예전보다 더 왕성했고, 아리엘이 출감한 지 2개월 만에 낸 앨범은 19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인도네시아 역대 앨범 판매 6위에 올랐다. 이후 그들은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대만 등지에 약 60개가량의 ‘사하바트 노아’라는 이름의 팬 커뮤니티를 거느린 슈퍼 그룹이 되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