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 성범죄 “의심 싫다” 반응에 일부 여성들 “니들끼리” 찬성 공조 분위기...서울교통공사 “전혀 검토 안 해”
지하철은 승객들이 붐비는 곳이다. 특히 지하철 내부에서는 언제든 여성을 겨냥한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남성들이 성범죄자로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는 장소 역시 지하철이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이같은 남녀 간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남성전용칸’을 만들어달라는 청원이 올라와 있다.
실제로 남성전용칸 제도는 일부 남성과 여성들 사이에서 꽤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남성전용칸’이 도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남성전용칸’ 청와대 청원 내용. 공식 홈페이지 캡처
2018년 5월 17일 청원인 A 씨는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범죄 대상으로써 물리적 조건만을 따지면 여성은 약자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나라는 성범죄에 있어서 남성 인권이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남성이 지하철 내에서 성추행 신고를 당했을 때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혐의를 벗어나기가 ‘별 따기’다”며 “남성전용칸 도입은 여성을 겨냥한 몰카나 성추행 범죄는 물론 남성들의 무고한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제도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써 남성전용칸을 만들어달라”고 강조했다.
경의중앙선 모습. 고성준 기자
‘남성전용칸’ 청원은 2018년 5월 30일 현재 약 1만 8000여 명의 추천을 받았다. 신기한 점은 추천인들의 댓글을 살펴보면 남녀 모두의 찬성 의견이 높다. 하지만 정작 이들 댓글 내용 중 “동의한다. 여성들이 너무 피해를 본다. 지하철 ‘몰카’ 좀 그만 찍고 임산부 좌석에 앉지 말고 ‘쩍벌’ 하지마세요”라며 “남자들 땀내도 너무 심하다. 제발 남성전용 만들어달라”는 비난을 동반한 호소글이 많다.
다른 남성 추천인은 “꽃뱀과 같은 생각으로 저를 누군가가 지하철 성추행자로 지목한다면 직장, 가족,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을 잃는다”며 “서로 추행과 무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남성이 범죄자가 될 것이 뻔하다. 남녀 탑승칸을 분리해달라”고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남성들은 자신들이 ‘잠재적 성범죄자’ 신분이 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한 공간에 있으면 서로가 불편하기 때문에 일종의 물리적인 분리 제도를 시행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지하철 펜스룰을 주장하는 셈이다.
성폭법 제11조(공중밀집장소에서의추행)은 “대중교통 수단 등 그밖에 공중이 밀집하는 장소에서 사람을 추행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문제는 지하철 내부의 특성상 성범죄자로 오해를 받을 경우 상당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법무법인 ‘우리’ 양제상 변호사는 “남성이 성범죄자로 오인받았을 경우 목격자가 없다면 수사기관은 여성의 진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성범죄에 대한 주장이 대립할 경우 남성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어렵다. 억울한 남성들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남성전용칸 도입 논란은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발생했었다. 2017년 5월 16일 도쿄 오다이바역에선 30대 여성의 신고로 역무원에게 조사를 받던 남성이 선로에 뛰어들었다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당시 치한으로 의심 받아 지하철 선로로 뛰어든 남성은 무려 7명. 이들 중 1명이 숨졌고, 한 남성은 억울한 나머지 건물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남성들 사이에서 ‘남성전용칸’ 도입 주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배경이다.
국내에선 일본만큼 극단적인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억울한 심정을 호소한 게시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양 변호사는 “다수의 남성과 여성이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문제가 생긴다.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정말 억울한 케이스도 있는데 자신의 명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의한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시민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최 아무개 씨(31)은 ‘남성전용칸’ 제도에 대해 “적극 찬성한다. 남녀를 분리해야 한다”며 “다만 지하철은 가족들이 이용하는 공간도 있다. 중앙 4량 정도는 혼성 칸으로 만들고 양끝을 남성전용과 여성전용칸으로 나눠야 한다. 무고죄가 너무 두렵다”고 전했다.
용 아무개 씨(여․32)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행이 있으면 따로 탈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지하철의 반은 남자, 반은 여자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용칸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 시민들이 전용칸이 아닌 칸에 ‘범죄를 당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지하철에 타는 것은 아니다”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지하철 2호선 전경. 최준필 기자
일부 여성들 사이에선 “남성전용칸 도입 주장이 펜스룰과 같은 맥락 아니냐”는 주장도 일고 있다. 펜스룰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아내가 동석하지 않는 자리에 다른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발언한데서 비롯됐다.
아내가 아닌 여성과 단둘이 만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면서 괜히 오해를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일부 남성들은 무고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여자와 일을 안 한다”는 의미로 펜스룰을 해석해 왔다. 최근 미투 논란에 대해 변질된 펜스룰로 맞선 방식이다.
백 아무개 씨(여․40)는 “남성전용칸 주장에서 일부 남성들의 오기가 보인다. 남성들도 지하철에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겠지만 지하철 성범죄의 피해자는 거의 여성이다”며 “남성전용칸은 억지 주장이다. 성범죄에 대해 남성의 책임이 점차 부각되니까 반발심에 기초해 남성전용칸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전용칸’ 도입이 펜스룰의 과도한 해석과 일맥상통한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그렇다면 ‘남성전용칸’ 도입 관련 실무를 담당하게 될 서울교통공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남성전용칸 청원은 요즘 사회분위기상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의견이다”며 분위기를 수긍하면서도 “여성 칸을 별도로 운영하면 출퇴근 승하차시에 많은 인파가 몰려 불편할 뿐 아니라 각종 안전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실제로 여성전용칸은 통합 전에 한번 시범적으로 했다가 도저히 운영상 어려움이 있어서 중지했다. 남성전용칸은 더 하다. 기본적으로 전혀 검토하거나 진행할 사항이 안 된다“며 남성전용칸 도입 불가를 못 박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하철 성범죄 예방을 위해 전용칸이 아닌 CCTV설치를 권장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시도별 도시철도 범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 동안 서울 인천 등 도시철도에서의 범죄는 7549건. 성범죄 비율은 66%였다. 매년 1000건 이상의 성범죄가 지하철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지하철 내 CCTV 설치율은 30% 이하다.
성범죄 피해여성은 물론 성범죄 의심을 받는 억울한 남성들에게 CCTV 등 지하철 내부에 범죄예방 시스템 확충이 더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더 나아가 남녀노소 모두가 ‘안전한 지하철’을 만들기 위해 남성전용칸 도입 이면에 자리한 ‘지하철 안전불감증‘과 남녀 성범죄 인식 갈등 해소가 무엇보다 절실해 보인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