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 주연 ‘은교’ 이후 트렌드화…“‘새하얀 도화지’에 원하는 이미지 만들려는 것”
물론 자신의 작품에 새로운 얼굴을 발탁하려는 감독들의 시도는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다. 감독들은 수천 명의 신인 연기자 혹은 연기자 지망생을 만나는 일도 마다지 않는다. 그 자체로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지만 기꺼이 나선다. 대중에 알려지지 않은, 때문에 마치 ‘원석’과도 같은 얼굴을 발탁해 자신이 그리려는 캐릭터와 이야기의 세계를 완성하고자 한다. 이에 더해 영화 제작 현장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감독들의 새 얼굴 찾기를 부추기고 있다.
# 김고은→김태리→전종서
이창동 감독은 2010년 연출한 ‘시’ 이후 오랜 공백을 딛고 신작 ‘버닝’을 기획하면서 작품을 이끌 세 명의 주연 배우 가운데 여주인공으로 신인을 찾는 데 주력했다. 이런 감독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기성 여배우들이 영화 참여를 타진하기도 했지만 감독은 고민 끝에 영화의 핵심적인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줄 여주인공을 신인 전종서에게 맡겼다. ‘버닝’ 출연 전까지 단편영화나 드라마 단역 등에도 출연한 경험이 전혀 없는 완전한 신인 전종서의 등장은 그 자체로 놀라움을 안겼다.
전종서. 영화 ‘버닝’ 스틸 컷
기성 여배우들을 뒤로하고 이창동 감독이 얼굴은 물론 이름까지 낯선 전종서를 발탁한 배경은 뭘까. 이에 대해 감독은 “전종서는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던 얼굴”이라고 밝혔다. 숱한 신인 연기자들을 오디션을 통해 만난 감독이지만 적합한 얼굴을 찾지 못했고, 그런 지난한 과정 속에서 촬영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전종서를 만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종서는 연기 경험이 없던 탓에 촬영을 앞두고도, 촬영을 진행하는 내내 이창동 감독의 세밀한 지도를 받아야 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감독 역시 전종서라는 ‘새하얀 도화지’와 같은 배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인물과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 여배우를 발탁해 영화 주연을 맡기는 시도는 2012년 김고은이 주연한 ‘은교’부터 본격화했다. 물론 이전에도 신인을 발탁하는 감독의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지만 ‘은교’를 통해 김고은이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이런 분위기는 영화계에서 하나의 트렌드처럼 자리 잡은 것도 사실이다.
혜성처럼 나타난 김고은, 이어진 ‘은교’의 성공 이후 신인 연기자를 발탁하려는 감독과 제작진의 시도는 계속됐다. 신인 박소담은 2015년 김윤석 강동원이 주연한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맹활약을 펼치면서 그해 각종 영화상 신인상을 휩쓸었다.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통해 발탁된 김태리도 있다. 높게는 15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이들은 화려한 데뷔 신고식을 치르고 난 지금, 영화계를 이끄는 배우로 성장해있다.
김고은. 영화 ‘은교’ 스틸 컷
곧 개봉하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 ‘마녀’ 역시 신인 여배우가 타이틀롤로 나선 작품이다. 한국영화에서는 드문 여성 원톱 액션영화로 신인 김다미가 당당히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앞서 김고은, 김태리, 전종서만큼이나 김다미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신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오디션에서 그는 1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연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 감독들의 새 얼굴 찾기…왜?
일제강점기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아가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찬욱 감독은 두 주연 캐릭터 가운데 한 명은 신인으로 캐스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고 싶은 마음에서 새로운 얼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작에 돌입하는 동시에 대대적으로 ‘주인공 찾기 오디션’을 진행한 이유다. 당시 감독이 내건 조건은 ‘최고 수위 노출도 가능해야 한다’는 단서다. 실제로 영화에는 상당한 수위의 노출과 파격적인 베드신 장면이 담겨있다. 이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고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각오가 된 사람만이 지원해달라는 당부였다. 당시 ‘아가씨’ 오디션에 응시자는 1500여 명에 달했다.
박찬욱 감독은 김태리를 ‘아가씨’의 주연으로 발탁한 이유를 두고 “그의 외모는 그동안 보지 못한 아름다움”이라고 평했다. 굳이 신인이어야 했던 배경에 대해 감독은 “기존 연기자들이 미리 정해놓는 어떠한 ‘상’(像)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대호’와 ‘신세계’ 등으로 선 굵은 영화를 주로 내놓았던 박훈정 감독이 ‘마녀’를 통해 처음 여성 원톱 영화를 내놓으면서 굳이 신인을 발탁해 주연으로 맡긴 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동안 활동해온 기성 배우에 대중이 갖는 특정한 이미지의 부담을 덜어내고, 새로운 인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긴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김다미. 영화 ‘마녀’ 스틸 컷
이렇게 발탁되는 신인 연기자가 참여하는 작품은 대부분 배우의 과감한 도전을 필요로 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은교’의 김고은부터 ‘아가씨’의 김태리를 거쳐 이번 ‘버닝’의 전종서에 이르기까지 극 중 사건을 만들어내는 상황 속에서 노출 연기를 소화했다. 기존에 활동하는 여배우들의 경우 노출 등 연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 이런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는 과감한 신인들은 도전의 마음으로 이에 기꺼이 나서, 매력적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셈이다.
감독들이 찾아낸 신인은 그대로 한국영화에 상당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김태리는 현재 영화 제작진이 가장 원하는 캐스팅 1순위의 여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아가씨’에 이어 지난해 말 내놓은 ‘1987’로 다시 한 번 성공을 맛봤고 올해 2월 주연한 ‘리틀 포레스트’를 통해 연기력은 물론 티켓파워까지 증명했다. 스포트라이트 속에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김고은도 마찬가지다. ‘은교’를 마치고 ‘차이나타운’ ‘협녀:칼의 기억’ 등 주연으로 활약한 그는 7월 개봉하는 이준익 감독의 ‘변산’으로 돌아온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