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이나 무지개 아닌 현실적인 행복 속으로…
부탄이라는 나라를 너무 신비스럽게만 포장하고 싶지 않다. ‘샹그릴라’라고 불리는 그곳이 정말 누구에게나 그러할까는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샹그릴라의 행복은 객관적 ‘장소’가 아닌 주관적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열흘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여행으로 부탄을 알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어떤 이끌림으로 미지의 세계에 문을 두드렸고 그들이 아끼듯 살짝 내어준 공간으로 잠시나마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 길 끝에서 어렴풋이 무지개 너머가 아닌 실제의 부탄을 만났다.
부탄 유일의 국제공항인 파로공항.
# 소박한 평화로의 기꺼운 끌림
각 나라마다 특유의 첫 느낌이 있다. 부탄공항에서 한 발 한 발 비행기의 계단을 내려 그 땅에 첫 발을 디딘 느낌은 평화로움과 청정함이었다. 높고 푸른 초록의 산들에 빙 둘러싸인 활주로에는 우리가 내린 비행기 한 대가 전부여서 공항에서부터 느껴지는 소박한 평화는 이내 여행자들의 마음을 은근하게 사로잡았다.
얼른 짐을 찾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공항이 아니다. 부탄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공항 건물로 다가가며 ‘아, 비로소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왔구나’ 실감하기 시작한다.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그 끌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기꺼운 여정이 그렇게 시작됐다.
부탄 파로 공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곳에 착륙할 수 있는 파일럿도 제한되어 있다.
일행은 취재진뿐은 아니다. 부탄에서 잊었던 나를 찾고, 그래서 다시 한번, 생의 의미를 알아보자는 취지로 일요신문이 마련한 ‘명상요가 힐링캠프’가 동시에 진행됐다. 말하자면 인생의 틈새에서 만들어가는 작은 리셋(reset), 비긴어게인(begin again)이다.
어디든 갈 수 있는 400여만 원의 꽤 큰 여행경비를 자비로 부담하고 어려운 시간을 내 부탄여행에 동참한 여행자들은 무엇을 바라고 이 여행에 합류한 것일까. 왜 볼 것 많다는 유럽이나 미주가 아닌, 남태평양의 근사한 휴양지나 동남아의 고급 리조트가 아닌, 남미의 고대도시나 아프리카의 초원이 아닌, 하필이면 부탄여행을 선택한 것일까.
파로 시내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일요신문 힐링캠프 여행단.
# 백인백색, 명상과 요가로 뭉쳤다
그러한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함께 온 여행자들을 관찰하게 만든다. 여행객들의 직업군은 다양하다. 외국계 회사 CEO를 지내며 승승장구하다가 은퇴한 사업가, 몇 십 년간 모은 소장품으로 근현대박물관을 운영하는 원장, 별별 사람 다 상대하는 금융사무원, 두 아이를 모두 시집·장가 보낸 주부, 아침부터 맥주를 주스 대신 마시는 주방기구 납품업체 임원, 저녁식사 자리에서 고시조를 읊조리는 변호사 등.
생활환경이나 성격, 나이, 취향도 가지각색이다. 40대부터 60대까지가 두루 섞이니 세대차이가 안 난다 할 수도 없다. 함께 사는 가족이나 오래 사귄 친구끼리도 9일간의 여정 속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속출한다. 여행 일정에 대한 저마다의 바람이 다르고 매순간 느끼는 바도 각각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고유한, 오랜 세월의 개성을 하나로 묶어준 연결고리는 바로 명상과 요가다.
서로 모르는 낯선 사이였지만 여행의 테마였던 ‘나를 찾아 떠나는 명상요가 힐링캠프’라는 주제 속에 동질의식이 있다. 개중엔 동행한 요가 선생님의 수업을 오랫동안 듣고 있는 이도 있었지만 명상과 요가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숙련도는 달라도 지향은 같다. 모두가 명상과 요가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 부탄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행복감을 만나고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자신을 맡긴 사람들이다.
마니차를 돌리는 것으로 경전을 읽는 것을 대신한다.
이번 여행이 장소나 가격만 보고 가는 일반 패키지여행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여정의 질보다는 장소에 매달린다.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국가가 일반인에게 자유로운 여행을 허락한 것이 기껏 30여 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도 그럴 만하지만, 결코 싸고 좋은 패키지여행은 없다는 걸, 한두 번의 패키지여행 경험자들은 알아버렸다. 믿었던 거대 여행사의 도끼에 수차례 발등이 찍히고 나면, 여행도 결국 좋은 것을 원한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찌되었든 일행은 모두 행복을 찾아, 행복의 나라로 떠나왔다. 현실이 그리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부탄)만의 행복을 살짝이나마 맛보고 싶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명상을 하며 사방을 헤매던 자신을 다시 자기에게로 붙잡아 오고,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다 보면 잃었던 입맛처럼 잃었던 생의 의욕이 절로 생겨날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인의 행복감이 세계 147개 나라 중 118위라니(팔레스타인 국민의 행복감과 비슷, 2015년 미국 갤럽 조사) 아무리 행복감이 주관적인 것이라 해도 국민 모두가 골고루 느낀다는 부탄의 개관적 행복감을 염탐해 보고 싶다.
정부지원으로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여행사를 차린 유겐 텐진(Ugyen Tenzin).
여행객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고 오는 부탄은 불교국가, 히말라야에 걸쳐 있어 산이 높은 나라, 맑은 공기와 순수한 사람들, 신호등 없는 거리, 전통복장의 사람들, 오염 없는 청정한 대지, 절벽 위에 신성하게 세워진 사원, 국왕이 존경받는 나라, 아직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모든 식재료가 유기농이라는 것과 학교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덕에 도시인의 영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 부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부에 하루 200~250불 가량의 로열티(호텔, 식사, 차량, 가이드 등 모든 여행경비가 포함됨)를 지불해야 하고 배낭여행이 불가하다는 점 등이다.
그 중에서도 부탄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Index)가 세계 1위라는 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부탄에 가보고 싶어 하는 주된 이유도 바로 그 행복지수 때문이다. 남들의 행복을 엿보고 나도 한번 제대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 그 소망들이 부탄까지 날아오게 했다.
하지만 그토록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인 행복을 부탄 여행을 오는 것만으로 충분히 느껴볼 수 있을까. 의심은 이 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한 나(일요신문 여행레저 기자)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그 의심을 풀기 위해 부탄의 풍광에 젖어들기 전, 부탄정부의 핵심기구인 국민총행복위원회 지역개발팀의 페마 라자르(Pema Razar)부터 만났다.
페마 라자르는 부탄국민의 행복은 정책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부탄의 모든 정책은 총행복위원회의 검증을 거친다”
“나에서 끝나는 행복이 아닌 지속가능한 행복에 대해 고심한다”
페마 라자르(Pema Razar)는 13년간 이곳에서 일했으며 누구보다 국민총행복위원회의 방향과 부탄행복정책에 대해 꿰뚫고 있다. 국민총행복위원회는 그 이름만 보면 별 것 아닌 문화기관 같지만 부탄 정부의 모든 정책은 이 행복위원회를 통해 검증되고 실현된다. 국민총행복위원회의 수장이 국무총리이며 부위원장은 재무장관이라는 사실만 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 정책으로 인해 우리 국민은 얼마나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슬로건을 국가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 모든 정책을 검토합니다. 단기적인 문제의 개선보다는 향후 몇 십 년, 몇 백 년을 바라보고 장기적인 삶의 환경을 위해 정책을 연구하지요. 나에서 끝나는 행복이 아니라 후세에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행복에 대해 고심합니다.”
겉모습은 소박해 보이지만 내실이 단단한 부탄과 부탄인.
농촌인구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농촌의 농지와 집, 농기구, 가축을 무료로 지원해 주고 때와 필요에 따라 농사기술을 전수해 준다. 농사의 리스크를 정부가 농민과 함께 대비하며 정부는 농민의 보험 역할을 자처한다. 농촌에서는 정부 주도하에 주기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며 작은 공동체마다 각자의 역할분담을 통한 트레이닝과 지속적 배움이 이루어진다.
부탄의 모든 농산물은 유기농이다.
부탄의 국민총행복지수라는 것도 추상적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4기둥, 9영역, 33지표, 124개 세부지표가 존재한다. 지속 가능하고 공평한 사회경제 발전, 문화의 보전과 증진, 생태계의 보전, 굿 거버넌스라는 4개의 기둥을 토대로 생활수준, 교육, 건강, 문화적 다양성 및 복원력, 공동체 활력, 심리적 웰빙, 시간 사용, 생태적 다양성 및 복원력, 굿 거버넌스 라는 9개의 기본영역으로 나누고, 다시 33개의 지표로 구성해, 그것을 124개의 세부 지표로 정리해서 국가 발전 방향과 정책을 제시한다.
주거, 소득, 직업, 공동체, 교육, 환경, 시민참여, 건강, 삶의 만족도, 안전, 좋은 정부의 역할, 시간사용, 생활수준, 인프라, 일과 삶의 균형 등 개인과 사회의 물질적 웰빙과 정신적·문화적 필요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추구한다.
이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국민 삶의 질을 측정하며 충분문턱과 행복문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기준점을 세우고 만족도를 살핀다.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며 놀랍도록 섬세하다. 이렇게 확고한 부탄의 행복개념과 정책, 실현과정을 들으니 그들의 행복이 사람들의 생각처럼 무지개 너머에 있지 않음을, 바로 여기에서 매순간 구체화되고 있음에 감탄이 새어 나온다.
부탄의 모든 건축물은 전통양식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 잘 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
이곳에 머물며 부탄을 바라볼 때, 못 사는 나라, 잘 사는 나라를 가르는 기준이란 것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다루는 서구 시각에서 자연스레 벗어나게 된다. 부탄은 자국의 판단으로도, 직접 가서 본 느낌으로도 결코 못 살지 않는다. 경제적 성장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행복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그보다는 물질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 삶의 향상과 전통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부탄 정부와 국민들의 생각이다.
자국에서 생산된 유기농 먹을거리가 식탁을 책임지고, 국민 누구나 모든 공교육(유치원부터 10학년까지)과 의료서비스를 무상으로 받고, 끈끈한 지역 공동체와 불교적 철학이 개개인에게 뿌리 깊게 배어있어 자연스럽게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며, 국민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고심하는 국가가 있는 이 나라를 누가 감히 못산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부탄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희망에 차있다.
부탄에서 우리는 결국 행복은 국가가 모두 책임질 수도, 그렇다고 개인이 혼자 쟁취할 수도 없는 문제임을 상기했다. “행복은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지만 그것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라는 말처럼, 일행은 부탄을 여행하며, 그 풍광과 사람을 경험하며, 각각 나름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또 그보다 더 종종 집단적으로 행복감을 느끼고는 했다.
‘공항이 있는 파로에서 수도 팀부로…’ 기사 이어집니다.
글·사진=이송이 여행레저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