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필상 고려대 교수. 전 총장 | ||
정부는 경제위기의 고통을 근로자들에게 넘기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개정하여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일 예정이다. 또 비정규직 보호법을 개정하여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현재 2년에서 3~4년으로 연장할 방침이다. 더 나아가 고령자에 대한 최저임금제 차등적용, 재량 근로제 확대 및 초과 근로수당 할인 등의 조치도 취할 예정이다. 모두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책들이다. 한편 정부는 늘어나게 될 빈곤층을 위해 긴급지원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면서 고소득층에게는 감세 조치를 취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지출은 줄인 예산안을 억지 통과 시켰다. 앞뒤가 맞지 앉는 말잔치까지 벌이는 셈이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중소기업과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허리가 끊겼다. 여기에 부동산과 증권시장이 거품으로 들떠 고소득층의 잔치판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사회 양극화가 심화하여 저소득층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실업과 부채의 2중고 속에서 살길이 막막하다. 정부의 공식통계상 실업률은 3% 수준이다. 그러나 구직단념자, 취업준비생, 일용직 등 불완전 취업자를 포함하면 실질적인 실업상태의 인구가 300만 명이 넘는다. 체감실업률이 12%나 된다. 여기에 빚 부담이 보통 큰 것이 아니다. 가계부채 구모가 총 700조 원에 이르러 가구 당 빚이 4000만 원에 이른다. 젊은 근로자들의 고통은 특히 크다. 아무것도 못하는 슬픈 백수로 길거리를 헤매는 청년실업자들이 100만이 넘는다. 이들은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결혼은 꿈도 못 꾼다. 경제 위기가 젊은이들의 사회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기업을 위해 근로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경제와 사회를 더 망가뜨리는 악이 될 수 있다.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온갖 정책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전제조건을 잊고 있다. 앞으로 쏟아져 나올 실업자와 빈곤층에 대한 뚜렷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없다. 자금을 퍼붓고 기업을 살리면 된다는 단순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형건설사업 추진, 부동산 규제완화, 세금감면, 구제금융 제공, 금리인하 등 갖가지 팽창정책을 펴고 있다. 결과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으로 경제를 부실 덩어리로 키우고 서민경제만 희생시킬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노사정 합의하에 노동정책과 복지정책을 마련하여 경제 밑바닥부터 메워야 한다. 다음 구조조정과 갖가지 재정사업 추진 등 경제 살리기에 전념하는 수순을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