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파 VS 형님파 석 달째 ‘줄다리기’
▲ 정운찬 총리(왼쪽), 이상득 의원 | ||
총리실 안팎에선 정 총리가 취임 후 줄곧 ‘정무부문에 미숙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도 정무실장 교체시기가 늦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이 때문에 정 총리 역시 새로운 정무실장 찾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야권에서 해임건의안 논의가 이뤄지고 있고,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안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2월 중에 새로운 정무실장이 나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 총리실 최고의 요직으로 꼽히긴 하지만 고작(?) 1급 공무원에 불과한 정무실장 임명을 둘러싸고 왜 여권 내부에서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는지 그 내막을 따라가 봤다.
한나라당 사무처 공채 출신인 이병용 정무실장은 당내 대표적인 ‘기획통’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천막 당사 시절 당 전략기획국장을 맡아 17대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이 실장은 장다사로 조직국장(현 청와대 비서관), 정양석 기획조정국장(현 한나라당 의원) 등과 함께 ‘사무처 트로이카’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당시 사무총장이던 대통령 ‘형님’ 이상득 의원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 의원은 당이 어렵던 시절에 함께 일했던 이 실장을 각별히 생각한다고 사석에서 여러 차례 말했다. 또한 업무 능력도 뛰어나 이 실장이 올린 보고서는 언제나 흡족해했다”고 전했다. 지난 2008년 3월 이 실장이 정무실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 의원과의 이러한 인연 때문이란 게 정치권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정운찬 총리가 전격 취임하면서 이 실장 ‘경질론’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보통 정무실장은 총리 최측근 인사가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상득 의원이 천거한 것으로 알려진 이 실장이 소장파 지원을 업고 취임한 정 총리 밑에서 일하는 게 껄끄러울 것이란 말도 흘러나왔다. 사실 여권 소장파와 이상득 의원 그룹은 인수위 때부터 여러 차례 부딪혀왔다. 정권 초 정두언 의원으로부터 촉발된 ‘권력 사유화’ 논쟁도 양측의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었다. 여의도의 한 정치컨설턴트는 “엄밀히 말하면 이상득 의원이 독주하고, 소장파 의원들이 간간이 견제를 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이 의원이 2선 후퇴를 선언한 뒤 소장파들도 점점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정운찬 총리를 만드는 데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따라서 소장파와 가까운 정 총리와 이상득계로 분류되는 이 실장이 ‘한 배’를 타기가 힘들 것이란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정 총리 역시 국회 인사청문회를 마친 후 이 실장 측에 사퇴를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엔 이 실장의 정치적 배경과 함께 청문회 과정에서 야권은 물론 한나라당에서조차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이병용 실장은 인사청문회 준비 태스크포스(TF) 팀장이었다. 정 총리는 당직 생활을 오래 해 국회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이 실장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만약 정 총리가 청문회를 성공적으로 통과했다면 이 실장은 유임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정 총리는 청문회 내내 수세에 몰렸다. 본인 실책도 있었지만 TF팀의 준비 부족 탓이 큰 것으로 인식했고, 이 실장을 그만두게 하는 쪽으로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안다”고 털어놨다. 한나라당의 한 보좌관 역시 “지지 기반이 취약한 정 총리로서는 정권 실세들과 가까운 이 실장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게 더 유리할 수 있다. 당내에서도 이 실장이 당분간 총리실에 머물 것이라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청문회가 끝나고 그러한 기류는 바뀌었고, 결국 이 실장은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청문회를 마친 정 총리는 즉시 새로운 정무실장 인선 작업에 들어갔다. 정 총리의 한 지인은 “청문회도 청문회지만 정 총리는 세종시 원안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국회 업무를 맡는 정무실장과 공보를 책임지는 공보실장에 자신이 믿을 만한 측근을 앉혀야겠다고 자주 말했다. ‘괜찮은 사람 없냐’며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정무실장 적임자를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앞서의 정 총리 지인은 “정무실장은 아무래도 정치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 ‘주군’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충성심도 필요하다. 그런데 정 총리 주위엔 학자들은 많지만 그런 인물은 별로 없다. 그래서 정 총리가 고민 끝에 자신을 천거해 준 소장파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소장파 그룹에 속한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정무실장 자리가 무슨 인사청문회를 하는 자리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 정 총리가 ‘OK’ 했는데도 안 된 것을 보면 뭔가 다른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면서 “우리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쪽이 이상득 의원 그룹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총리실 내에서 이 의원 최측근인 박영준 국무차장과 청와대의 이 의원 세력이 반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상득계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우리가 1급 공무원 임명에까지 관여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 소장파 쪽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일축했다.
김 씨 임명이 무산되자 소장파는 또 다른 후보를 내세웠다. 정두언 의원 측근으로 분류되는 이 아무개 씨였다. 이명박 대통령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이 씨는 인수위를 거쳐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 통신사 임원으로 근무 중이다. 총리실 관계자는 “이 씨의 경우 당·청 가교 역할을 잘 해줄 것으로 판단했고 특별한 흠결도 없었다. 사실상 내정됐었다”고 밝혔다. 청와대에서도 이 씨 임명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씨 역시 정무실장 입성에 실패했다.
또다시 이상득계가 압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장파는 분개했다. 한 소장파 의원 보좌관은 “설마 했는데 이 씨 탈락으로 확실해진 것 아니냐. 더 이상 우리도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드시 정무실장 자리를 지켜내자고 결의를 다졌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나라당의 한 중도성향 의원도 “이 씨 임명이 좌절된 후 정무실장 자리에 쏠리는 당내 관심이 커졌다. 여권의 잠재적 불안 요소라고도 할 수 있는 소장파와 이상득 의원 그룹 간 대결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잇달아 자존심을 구긴 소장파가 마지막 ‘히든카드’로 제시한 인물은 전직 국가정보원 간부 김 아무개 씨로 역시 정두언 의원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국정원에 투신한 김 씨는 인수위에 발탁되면서 소장파를 포함한 여권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이상득 의원 역시 평소 김 씨의 업무 능력과 정무 감각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소장파가 김 씨를 정무실장 후임자로 정 총리에 추천한 것도 이상득계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총리실 내부에서는 김 씨가 조만간 출근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 씨 임명은 결국 불발됐다. 이번엔 한나라당 친박계가 거세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한 친박 의원은 “우리가 정무실장 자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순 없지만 김 씨를 앉히겠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었다. 김 씨는 지난 경선 때 이른바 ‘박근혜 파일’을 유출시킨 의혹을 받았던 자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인물이 국회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 이러한 입장을 총리실 측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도 “이상득계와 소장파 모두 김 씨에 긍정적이었다. 정 총리가 최종 도장을 찍는 일만 남았었는데 친박계 항의를 받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세종시 처리를 앞두고 괜히 박 전 대표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정 총리가 뜻을 접은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또한 총리실 내부와 야권에서 정보기관 출신을 정무실장에 임명하는 것에 대한 비난이 나왔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정무실장 인사가 번번이 불발되자 정 총리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언론과 정치권에서 연일 총리의 정무기능을 문제 삼자 소장파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대정부질문에서 ‘731부대’ ‘마루타’ 발언 등으로 구설에 오르고, 올해 초 고 이용삼 민주당 의원 빈소 방문 시에 실언을 한 것도 정무 보좌가 부실했기 때문이라고 정 총리는 보고 있다는 것이다. 총리실 관계자는 “지금까지의 실수는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제부터다.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위한 국회 설득에 첨병 역할을 해야 할 정무실장의 임명이 계속 늦어지면 정 총리로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정무실장이 나올 것으로 본다”면서 “이상득계의 협조를 구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소장파를 믿었다가 낭패를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만난 총리실과 정치권의 대부분 관계자들 역시 3개월 이상 끌어온 정무실장 임명이 조만간 결론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정치권 인사는 “누가 되느냐를 보면 향후 여권 내 구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