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잡을 ‘친이 대타’로 오세훈 찍었나
▲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 참석에 앞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세종시 문제 등에 대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 ||
최근 정치권에는 여권의 차기 구도와 관련해 ‘이상득 음모론’이 조용하게 퍼지고 있다. 이 의원이 오세훈 서울시장의 재선 연임과 차기 대권을 패키지로 묶어 물밑에서 은밀하게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 시장이 청와대와 대립각을 자주 세워 재선도 어려울 것”이라는 정치권 일각의 주장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이 대통령이 ‘심각하게’ 고려하는 차기 후계자감으로 통한다. 이밖에 정몽준 대표도 바깥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대통령이 언급했던 ‘일 잘하는 사람’의 최적임자가 누구인지 예상해봤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월 9일 충청북도를 방문, 업무보고를 받았다. 그의 입에서 “나는 솔직히 일 잘하는 사람을 밀고 싶고 지원하고 싶어진다”라는 말이 나오자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먼저 ‘일 잘하는 사람’은 이 대통령이 심중에 숨겨둔 차기 대권주자의 기준을 은연중 드러냈다는 해석이 나왔다. 물론 청와대와 여권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발언이 지자체단체장을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이라며 ‘차기’와 연결 지으려는 시선을 차단했지만 정가에서 ‘뼈 있는 말’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이날 이 대통령은 “정치적 계산,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하면 발전할 수 없다”라며 최근 박 전 대표의 세종시 무조건 반대 행보를 간접 비판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박 전 대표는 예의 신중함이나 은유적인 표현 관례를 벗어나 즉각 반기를 들었다. 그는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국민이 판단할 것”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의 이 발언은 국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차기 대권을 쟁취하겠다는 당당함의 발로이자, 이 대통령에 대한 정면 선전포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친박계 내부에서도 차기 대권 주자와 관련이 있는 현직 대통령의 민감한 발언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작심하고 직설적인 반박을 한 것에 대해 “다소 성급했다”는 자성론도 나왔다. “저만치 앞서 달리는 부동의 1위가 대통령의 지나가는 발언을 너무 무겁게 해석해 오히려 대권에 대한 조급증과 집착을 노출해버렸다”는 비판도 그래서 나온다. 이는 세종시 정국을 통해 이 대통령으로부터 ‘축출’을 전제로 한 과도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박 전 대표의 위기감이 과민반응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이 말하는 ‘일 잘하는 사람’은 어떤 인물일까. 이 대통령은 평소 자신은 일만 하려는데 계파니 정치니 하는 것이 발목을 잡는다는 식의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 그 자신 스스로도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고 수차례 토로했다. 세종시 정국을 지켜보면서 지금처럼 계파전쟁에 사로잡힌 여의도 정치의 비효율성이 못마땅하게 보였을 때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대통령이 고려하는 차기 주자의 첫 번째 기준은 ‘정치 또는 계파’에 묶여 있는 ‘정치인’보다 가장 비정치적이고 ‘일’에만 매진할 수 있는 인물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정치 공학적으로 생각하면 발전할 수 없다”라고 강조한 부분을 보면 차기 지도자감도 계파의 수장(박근혜 전 대표)에 머물러 있는 정치인이 아닌 ‘일’에만 매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물을 더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권에 그런 인물이 있을까. 오세훈 서울시장은 박근혜 전 대표를 제외하고 여권 내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차기 대선 주자다(지난해 말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박근혜 전 대표를 제외하고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17.3%로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15.8%), 김문수 경기지사(10.4)를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해 화제가 됐음). 그런데 오 시장은 한나라당 내에서 ‘이단아’로 통한다. 계파나 조직에 얽매이기를 싫어해 ‘미운오리새끼’ 쯤으로 통한다. ‘정치는 조직’이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는 특이하다 못해 같이 정치를 하지 못할 사람으로까지 낙인찍히기도 한다. 한나라당에서 오랫동안 소장개혁파로 활동해온 한 관계자는 그를 두고 “오 시장을 보면 여의도 정치인 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인 것 같다. 정치란 게 조직이고 연대인데 그런 점에서 그는 언제나 ‘마이웨이’다. 좀 잘난 척하는 구석도 있고 해서 같이 정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비호감 정치인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오세훈 비호감’론은 사실 한나라당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기는 하다. 당 일각에서는 그의 서울시장 재선이 친이그룹의 손에 달려 있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서울지역 28개 당협위원장들 가운데 ‘오세훈 서울시장이 재선돼야 한다’는 열혈 지지자는 2명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올 만큼 그의 당내 조직은 전무한 편이다. 역시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이나 정두언 의원 등 수도권 친이 핵심들의 조직적인 지원 없이는 그의 서울시장 재선은 언감생심이다. 대권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는 ‘비박(박 전 대표를 제외한) 그룹’의 대권주자 가운데 선두를 달릴 만큼 대중적 인기가 높다. 여기에 이 대통령이 말하는 ‘일 잘하는 사람’의 리스트에도 오를 수 있다. 그는 비록 정치인이긴 하지만 당내 계파와는 거의 무관하다. 이는 주로 오 시장 자신이 정치적 행보를 자제했고, 또 성향도 여의도와 맞지 않기 때문에 생긴 ‘자의 반 타의 반’의 결과다.
이런 오 시장의 차기 주자 가능성은 지난해 말부터 한나라당에 퍼지고 있는 ‘이상득 음모론’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차기 주자와 관련해 ‘형님’ 이상득 의원과 긴밀하게 교감하는데 지난해 말부터 이미 오세훈 서울시장을 유력한 차기 주자로 점찍고 키우고 있다는 게 그 요지다. 먼저 이상득 의원이 오 시장을 재선 시장으로 밀어올린 뒤 2012년 대선 후보 경선에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로 내세운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친이 계열의 한 중진 의원은 이에 대해 “이상득 의원으로서는 ‘대통령의 형’ 노건평 씨 같은 최악의 경우를 피해야 한다. ‘안전판’을 바라는 그가 사실상 오 시장을 차기 주자로 낙점하고 서울시장 재선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시각이 당내에 있다. 원희룡 의원은 경선 레이스의 페이스메이커로 붙여 흥행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중순부터 차기 서울시장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J, K 의원 등이 치고 올라오자 이 의원 측이 불안해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K 의원 관련 사건이 터지자 이 의원 측이 ‘작업’을 했다는 소문이 당내에 파다했다(이 과정에서 경찰 정보를 본 일부 의원들이 K 의원 측에 그 사실을 귀띔해줬다는 얘기도 있었음). 결과적으로 이 의원 측이 당내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들의 힘을 미리 뺀 뒤 오세훈 재선 가도의 터를 닦으려 한다고 보는 시각이 ‘이상득 음모론’으로 재생산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 측에서는 항간의 이런 음모론에 대해 펄쩍 뛰며 부인하고 있다. “요즘처럼 현안에 대해 말을 하지도 않는데 그런 일을 도모할 리가 있느냐”는 반응이다. 이 의원을 잘 아는 또 다른 의원은 이에 대해 “이 의원은 그처럼 치밀하고 전략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당내에 떠도는 소문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의원이 오 시장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11월 말 이 의원은 기자들과의 사석에서 ‘오세훈은 자주 만나고 같이 일을 할수록 좋은 면이 많이 보이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언급했다는 후문이다. 그 뒤에도 이 의원은 수시로 오 시장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그는 한 친이 직계 의원에게 ‘지역구(포항)에 오세훈과 함께 간 적이 있는데 정말 인기가 많더라. 박근혜는 신비주의와 동정심으로 지지도를 유지하지만, 그뿐이다. 차기 대권은 힘들어 보인다’며 오 시장을 대권주자로 띄우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실 오 시장 ‘낙점론’은 친이 주류가 점점 마땅한 대권 주자를 찾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상황에서 나온 ‘차선책’의 성격이 짙다. 일단 유력한 후보로 키워놓아야 후일에 마땅한 주자가 없을 때 대타로 쓸 수 있다는 해석이 지금은 더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오 시장에 대한 친이계와 소장파의 ‘비호감’론이 여전히 상당하고, 당내의 조직도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대중 정권 시절 주류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도 경선에서 실패했던 이인제 의원의 경우처럼 당의 일부가 무조건 밀어준다고 해서 오 시장이 대권에 성큼 다가섰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 ‘당심’을 얻지 못해 턱걸이 당선됐던 이명박 대통령의 예처럼 당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하면 오 시장의 재선도 지금으로선 보장할 수 없다.
여기에다 오 시장이 전임이었던 이명박 시장 시절의 정책을 비판하며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워 정권 눈 밖에 났다는 얘기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오 시장의 재선을 저지하기 위해 건설회사 관련 비리 의혹을 집중 내사했다는 설도 있다. 뉴타운 정책 등을 두고도 이 대통령과 갈등을 빚은 대목도 그의 ‘낙점론’을 어둡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친이 주류가 계속 마땅한 주자를 찾지 못할 경우 오 시장의 몸값은 계속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오 시장이 차차기를 담보로 박근혜 전 대표와 전격 연대를 결행할 경우 친이 주류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오세훈 시장은 지난 16대 국회에서 불출마와 정계은퇴 선언을 발판으로 서울시 수장에 오른, 가장 정치적인 결단으로 현재의 대권주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럼에도 비 계파성이라는 종이에 포장돼 ‘일 잘하는 사람’으로 계속 분류된다면 향후 대권 구도에서 폭풍의 핵이 될 가능성이 있다.
▲ 정몽준 대표(왼쪽), 정운찬 총리 | ||
정몽준 ‘그럼 나는요?’
이명박 대통령이 말한 ‘일 잘하는 사람’의 본질은 비정치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몽준 대표도 오세훈 서울시장과 비슷한 유형의 정치인이다. 5선의 무소속 의원을 지내고 6선이 되어서야 집권 여당의 대표를 맡은 정 대표만큼 계파에 초연한 당내 인물도 없다. 이는 그의 한계이자 잠재력인 동시에 이 대통령의 ‘일 잘하는 사람’ 기준을 매력적으로 충족시키고 있다.
최근 청와대 주변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은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비록 당내 기반이 없고 여론 지지율조차 저조한 상태지만 여전히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로 판단하고 있다”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최근 이 대통령이 장광근 전 사무총장을 친이그룹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질시킨 것도 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엿보게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이 대통령은 자신도 당내 기반이 취약했지만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등의 힘을 입고 대권에 오른 것을 떠올리면 정 대표도 친이그룹이 발상의 전환을 통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경우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당초 정 대표는 여권의 ‘버리는 카드’라는 해석이 많았지만 지금은 이 대통령의 또 다른 히든카드로서 막판 역전극을 준비하고 있다.
4월 사퇴설이 나도는 정운찬 총리도 이 대통령의 ‘일 잘하는 사람’론에 근접한 후계자감이다. 정 총리는 지난해 9월 정치에 처음 입문한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로서 세종시 정국에서 발로 뛰며 ‘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도 그가 세종시 정국에만 묶여 특유의 화합정치를 펼 기회가 없는 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한 정 총리가 세종시 정국에서 피해를 본 부분도 많지만 단번에 여권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올라선 것은 일단 성공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최근 들어 정두언 의원 등 소장파들과도 폭넓은 교감을 하며 대권주자로서의 행보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