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성’ 명분 규제 예외 사안으로 둬…공정위 “총수 일가 지분 정리하라” 칼 겨눠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스템통합(SI) 계열사 등의 내부거래를 손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면서 대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 경영승계 편법이 부각되고 있다. 연합뉴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14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비주력·비상장 계열사에 대한 총수 일가 지분을 정리하라고 요구했다. 총수 일가가 대기업 핵심사업과 관련 없는 SI·물류·부동산관리·광고 계열사 등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한 것. 이들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관행도 문제 삼았다. 김 위원장은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 계열사 주식 보유와 관련해 공정위는 순차적으로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정위의 이러한 방침은 그간 사익편취 규제의 예외 대상이던 SI·물류·광고 계열사에 대한 부당 내부거래, 이를 통한 총수 일가의 경영승계 재원 마련 등을 제재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현행법에 따르면 사익편취 규제는 대기업집단 소속 계열회사가 총수 일가 지분이 상장사 30%, 비상장사 20% 이상인 계열사와 일정 금액 이상 거래하는 행위에 적용되지만 효율·보안·긴급성을 이유로 한 내부거래는 규제 예외 사안으로 둔다. 대표적인 예가 SI·물류·광고 계열사의 내부거래다. 김 위원장은 “하지만 이들 계열사 내부거래가 일감 몰아주기 논란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편법적 경영권 승계에도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SI 계열사의 내부거래가 제재 예외 대상에 포함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대기업들은 ‘보안성’을 이유로 기업의 정보시스템 등에 대한 관리·보수 업무를 내부 SI 계열사에 맡겨왔다. 지난해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 조사에 따르면, 국내 30대 기업들의 SI 계열사 내부거래액은 총 13조 1686억 원으로 전체 매출액의 57.8%를 차지했다. SI 계열사 50곳 중 내부거래 비중이 50%가 넘는 곳은 31곳이나 됐다.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인 곳은 현대차의 SI 계열사인 현대오토에버로 전체 매출의 89.4%인 1조 194억 원을 내부거래로 올렸다. OCI와 KT의 SI 계열사들은 각각 85.3%, 84.5%를 기록했으며, 롯데는 82.8%의 내부거래 비중을 보였다. 이밖에도 GS ITM, 신세계페이먼츠, 한진정보통신·유니컨버스, 포스코ICT, 삼성SDS는 70% 이상의 내부거래 비중을 보이며 계열사들로부터 시스템통합 업무를 대거 넘겨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SI 계열사로 일감을 몰아주는 것이 대기업들의 경영승계를 위한 편법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총수 일가 자녀들이 SI 계열사의 주식을 저가로 매입한 후 해당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줘 기업을 성장, 지분가치를 확대해 상속세 재원 등을 마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지 오래다.
지난해 CEO스코어 조사에 따르면, 국내 주요 기업 SI 계열사 55곳 중 오너 지분이 10%가 넘는 곳은 14곳이나 됐다. 지난 5월 기준 총수 일가 지분이 가장 높게 나타난 곳은 GS ITM이다. 허창수 GS그룹 회장 일가 17명이 80.6%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그 뒤로 현대오토에버와 삼성SDS가 각각 19.4%, 17.0%의 총수 일가 지분을 기록했다. 강신업 법무법인 하나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대기업들이 경영 승계 기반을 마련하는 방법 중 하나”라며 “지금의 지분구조나 내부거래 비중을 봤을 때 그 운영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수단인지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선 보안성 측면에서 SI 계열사의 내부거래가 불가피하다는 대기업들의 주장이 합당치 못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스템통합 업무를 외부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일부 은행의 경우 기본적인 업무는 자체적으로 처리하지만 특화·전문기술이 필요한 부분은 외부업체에 맡기고 있다.
사익편취 규제 예외 대상인 광고·물류 계열사의 내부거래 비중도 SI 계열사 못지않다. 지난해 공정위가 자산 10조 원 이상 대기업집단 27곳을 조사한 결과, 광고와 물류업체의 내부거래 비중은 2016년 말 기준으로 각각 37.6%, 33.7%를 기록했다.
현대글로비스는 2001년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100% 출자해 설립한 곳으로 2010년대 초반 90%에 육박하는 내부거래 비중을 보였다. 구광모 LG전자 상무가 7.5% 지분을 보유한 LG판토스는 지난해 전체 매출의 69.6%인 1조 3897억 원을 내부거래로 올렸다. 구 상무의 지분은 고 구본무 회장의 지분 상속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남근 법무법인 위민 변호사는 “SI사업은 업무 특성상 어느 정도 감안할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물류·광고 사업까지 규제 예외로 보긴 힘들다”며 “해당 사업들은 본래 중소기업들이 영위했던 것으로, 대기업들이 이에 급작스레 뛰어드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기업들은 최근 이들 계열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논란에서 벗어나고자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롯데와 한화의 SI 계열사인 롯데정보통신, 한화S&C가 분할·합병을 통해 총수 일가의 지분을 대거 정리하고 나선 것이 그 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보안성 등을 근거로 내부거래를 합리화하던 기업들이 스스로 불공정행위를 인정하는 셈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
건설사 ‘내부거래’는요? 이쪽도 계열사서 ‘받아먹기’ 국내 건설사들이 높은 내부거래 비중을 보이며 계열사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11일 CEO스코어데일리에 따르면 SK건설은 지난해 매출액 6조 4398억 원 중 31.0%를 내부거래 매출로 올리며 가장 높은 의존도를 보였다. 현대ENG의 내부거래 비중은 21.8%를 기록했으며 롯데건설과 삼성물산은 20%에 육박하는 내부거래 비중을 보였다. 그러나 삼성물산은 오너 일가가 31.1%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내부거래 비중이 18.4%에 그쳤다. 건설사들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입장을 내세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계열사에서 공장이나 시설을 건설해야 할 때 경영 정보 등을 노출할 수 없다 보니 내부 건설 계열사에 일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며 “내부 일을 계열사에 맡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올해 국토교통부(국토부)는 불공정 관행을 제재하기 위해 건설업 선진화를 추진한다. 그 일환으로 건설사의 시공능력평가 시 계열사에서 일감을 받거나 입찰 담합으로 쌓은 공사 실적은 평가에서 제외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내년 7월에 발표하는 평가부터 적용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