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주역에서 3김시대 한 축으로…
6월 23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다. 현대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 임준선 기자
[일요신문] 6월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산증인이다. 5·16 군부 쿠데타, 한일협정, 3당 합당, DJP 연합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장면마다 JP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박정희·김영삼·김대중 3명의 대통령을 만드는데 일조하면서 ‘킹메이커’라는 수식어를 얻었지만 정작 본인은 대권의 꿈을 이루진 못해 ‘영원한 2인자’로 불리기도 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권력의 부침을 거듭했던 JP를 두고 공과도 극명하게 엇갈리는 모습이다. DJ(2009년)와 YS(2015년)에 이어 JP가 세상을 떠나면서 ‘3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 30대 엘리트 군인, 쿠데타 주역으로
1924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난 JP는 1949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를 다니다 1948년 일반병으로 입대했지만,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탈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수한 뒤 서울대에 복학하지 않고 육사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JP를 필두로 한 육사 8기생들은 훗날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16 쿠데타의 핵심 역할을 맡았고, 군사정권 요직을 꿰찼다.
5·16 쿠데타가 발발할 때 JP는 군인이 아니었다. 4·19 직후인 1960년 5월 육사 동기들과 정군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상부에 제출하려다 발각돼 자진 예편한 상태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위기는 JP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쿠데타를 결심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쿠데타의 설계를 맡았던 JP는 박정희 정권의 기초를 닦는 데도 깊숙이 개입했다. 6개 조항으로 이뤄진 혁명공약을 집필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 설립 등을 주도했다. 1961년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발탁된 JP는 명실상부 정권 2인자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다섯이었다.
JP(왼쪽)가 1962년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한일 국교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해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을 만나고 있다. 대일 굴욕 협상 파문으로 결국 ‘2차 외유’를 떠나야 했다. 연합뉴스
JP의 독주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를 견제하던 육사 선배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소위 1963년 2월 ‘1차 외유’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귀국해 총선에 출마,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정계에 데뷔했다. 그리고 여당인 공화당 의장을 맡으면서 다시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는 듯 했지만 일본 외교 파동이 일면서 다시 한 번 도마에 올랐다. JP가 중정부장 시절이던 1962년 일본을 방문해 오히라 일본 외상과 대일 청구권 자금 규모를 확정한 ‘김-오히라 메모’가 공개되면서 대일 굴욕 협상이라는 비판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었다. 결국 JP는 1964년 6월 ‘2차 외유’를 떠나야 했다.
JP와 오히라 외상 간에 작성된 메모는 1965년 8월 발효된 ‘한일 협정’의 토대가 됐고, 밀실 합의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JP는 자신의 회고록 ‘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자금이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등 경제 성장의 마중물이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일 협상은 누군가 죽을 각오로 나서 담판을 짓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역사의 난제였다”며 “‘이완용 같은 매국노’라는 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날 어느 선진국 못지않은 자유민주주의, 그 바탕이 된 세계 경제 10위권의 경제력은 한·일 교섭에서 장만한 밑천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막 오른 3김 시대, 대권에 도전하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로 재직하는 등 유신정권 2인자로 탄탄대로를 걷던 JP는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기나긴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1980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JP를 부정축재자로 낙인찍어 정계에서 퇴출시켰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정치권을 떠났던 JP에게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는 신민주공화당을 만들어 대권에 도전했다. 4자 구도(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로 치러진 그해 대선에서 JP는 8.1%의 득표율로 4위를 기록했다. 이때부터를 현대 정치사 큰 축을 이루는 ‘3김 시대’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대선에선 패했지만 JP는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차지, 돌풍을 일으키면서 부활했다. 대전과 충남지역을 석권해 JP는 이 지역 맹주로 자리매김했다. YS는 부산·경남, DJ는 호남에서 두각을 나타내 지역구도가 뚜렷해진 선거이기도 했다.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JP는 ‘정치 9단’으로 불리던 YS와 DJ와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면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3김이 이끌었던 이 시대의 정치를 ‘보스 정치’ ‘지역 정치’ ‘계파 정치’ 등으로 부르며 비판하지만 한국 정당정치의 기틀을 잡았다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JP는 인위적 정계개편의 대표 사례인 1990년 3당 합당을 주도했다. 왼쪽부터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일요신문DB
JP는 인위적 정계개편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1990년 3당 합당을 주도했다. 여소야대 정국을 탈피하고자 했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대권을 노리던 YS·JP의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졌고, 결과적으론 호남을 기반으로 했던 평민당의 DJ가 고립됐다. 3당 합당은 신군부(노태우) 민주화(YS) 산업화(JP) 세력이 손을 잡은 것으로, 보수 대연합 성격을 띠는 동시에 반 호남을 무대로 했다. 지역과 이념의 편향성이 고착화된 셈인데, 그 여파는 오늘날 정치권 판세에까지 미치고 있다.
야당 총수에서 거대 여당의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JP는 내각제 개헌을 추진했지만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한 YS에게 14대 대선 후보 자리를 내주며 고배를 마셨다. JP는 대통령이 된 YS와 결별하고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1995년 지방선거와 1996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여당인 민자당, DJ의 새정치국민회의 이어 3당의 입지를 굳혔고 이는 JP가 대권 및 내각제의 꿈을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됐다. JP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극적인 드라마 DJP연합
1997년 대선을 앞두고 JP가 보수 진영의 이회창 후보와 손을 잡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점쳐졌었다. 아니, 당연하게 여겨졌다. JP 측근들 대부분이 이 후보와의 연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었다. 그런데 JP는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DJ와의 연대를 발표했다. 정치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이른바 ‘DJP연합’이다. 호남과 수도권 외에선 열세를 보이고 있던 DJ로선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DJ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JP가 초대 국무총리를 맡는다는 게 골자였다. DJ와 YS는 정책협약문을 작성했고, 내각 비율을 6대 4로 나누는 등 사실상 공동 정부 형태를 합의했다.
정치권에선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JP가 아들 병역 문제와 경제 위기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이회창 후보의 패배를 예측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보수 진영에선 “또 2인자 하려고 그러느냐”라는 비아냥거림도 파다했다. 이에 대해 JP는 훗날 “오랜 한을 품은 호남이 정권을 잡아야 갈라진 동서가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당시 JP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자신의 자택을 찾아온 DJ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진 빚을 갚아 드리겠다. 대통령이 되시면 박정희 기념관을 지어 달라”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JP는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DJ와의 연대를 발표했다.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이른바 ‘DJP연합’이다. 일요신문DB
DJP연합은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일궈냈다, 당시 DJ는 충청권에서 이회창 후보를 39만 표 차이로 앞섰는데, 전국 최종 집계 결과 DJ와 이회창 간 차이는 39만 표였다. JP는 국민의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오르면서 2인자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DJP연합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각제 개헌이 지켜지지 않자 JP 측의 불만은 팽배해졌고, 여기에 대북관계에 대한 이견이 심해지면서 사실상 DJP연합은 와해됐다. 보수와 진보,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대선이라는 목표 앞에 하나로 뭉쳤지만 결국은 등을 돌렸던 것이다.
JP가 이끄는 자민련은 2004년 노무현 탄핵에 동의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17대 총선에서 지역구 4석을 얻는 데 그쳤고, 사상 첫 10선을 노렸던 JP는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섰지만 정당 득표율마저 부진해 배지를 다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JP는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뒤로하고 은퇴했다.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JP는 정치 원로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투병 중이던 부인 박영옥 여사의 간호를 손수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