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중앙선 침범” 승객들 증언 묵살한 채 빅토르 최의 졸음운전에 의한 사고사로 종결
증조할아버지가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 이민 세대의 후손인 그는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록 뮤지션이었고 그 어떤 정치인이나 사상가나 문학가보다 청년 세대의 지지와 공감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이미 1990년대 중반 정지영 감독이 신성우 주연으로 영화화하려 했지만 프로젝트를 성사시키지 못한 적도 있었고, 2000년엔 윤도현이나 한대수가 그의 노래를 번안해서 부르기도 했다. 러시아에 귀화한 쇼트트랙 선수 안현수가 이름을 ‘빅토르 안’으로 바꾼 것도 빅토르 최에 대한 오마주였다. 하지만 그가 쌓은 업적을 기리기엔 그 어떤 것도 부족했다.
1962년에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빅토르 최는 성적 불량으로 예술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10대 시절에 보일러공으로 일하며 곡을 만들었다. 1982년, 스무 살에 알렉세이 르이빈(기타), 올렉 발린스키(드럼)와 밴드를 만든 빅토르 최. 영화를 좋아하고 이소룡을 숭배하던 그는 밴드 이름을 영화라는 뜻의 러시아어 ‘키노’로 지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조금씩 지명도를 쌓던 ‘키노’와 빅토르 최는 1988년 다섯 번째 앨범 ‘혈액형’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1988년엔 ‘이글라’를 통해 영화배우로도 자리매김을 한다. 이후 미국과 일본에서 공연했으며, 1990년 모스크바 콘서트 땐 6만 명 이상의 관객이 모였다. 당시 들썩이던 공산권에서 빅토르 최의 반체제적이며 저항적인 음악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상징이었으며, 그만큼 소비에트 연방 당국과 KGB는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미스터리한 죽음이었다. 그의 팬들 중에 경찰의 발표는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신 정보기관인 KGB가 교통사고를 위장해 그를 암살했다고 생각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판하고 전체주의 사회에 저항하며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빅토르 최였기 때문이다. 특히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 콘서트는, 마치 체제의 종말을 예견하는 듯한 거대한 열기의 용광로였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가장 큰 의문점은 경찰 수사 과정이었다. 만약 빅토르 최가 운전 중 졸다가 중앙선을 넘어 버스와 충돌했다면, 게다가 시속 130킬로미터의 속도였다면, 스키드 마크 같은 흔적이 현장에 남기 마련이다. 그런데 경찰은 버스 기사의 증언만으로 사건을 결론 내렸다. 그는 경찰에게 빅토르 최가 졸음운전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과속을 했다고 증언한 것. 어쩌면 가해자일 수도 있는 버스 기사의 일방적인 주장이 받아들여져 ‘사고사’로 종결된 것이다. 게다가 이후 버스 기사는 종적을 감추었는데, 한국의 어느 방송사 다큐멘터리에 의해 인터뷰가 이뤄졌을 때도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빅토르 최의 팬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 하지만 진짜 그 이유뿐인지 진실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버스 승객들의 증언은 기사의 주장과 달랐다. 그들에 의하면 버스가 중앙선을 넘어 빅토르 최의 승용차로 돌진했다는 것이다. 빅토르 최는 끊임없이 경적을 울렸지만, 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내며 마치 목표물을 향하듯 달렸다는 것이 그들의 일치된 증언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무시되었고 오로지 버스 기사의 말만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유족에게도 빅토르 최의 시신은 공개되지 않았다. 너무 잔혹한 사고였기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어서 당국이 배려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망자의 유족에게 시신 확인은 정당한 권리. 이에 유족들은 수차례 요구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처럼 의심을 살 만한 상황이 이어지자 KGB 암살설이 대두되었지만, 명확한 해명이 이뤄지진 않았다.
28세에 세상을 떠난 우상의 죽음은 당시 소비에트 연방 젊은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8월 19일,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장례식엔 수만 명의 팬들이 운집했으며, 이후 이 지역 자살 시도가 30퍼센트 증가했으며, 다섯 명의 팬이 빅토르 최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월엔 그들의 마지막 앨범인 ‘블랙 앨범’이 나왔고, 다음 해인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