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 다 죽는데 원칙만 외칠거요’
▲ 2009년 2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청와대 회동에서 만난 모습. | ||
하지만 박 전 대표의 반대 결기가 여전히 매섭고 수정안 찬성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기 때문에 친박계 내부에선 이번 기회에 의원직 사퇴 등의 초강수를 다시 던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큰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본선이 3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배수의 진을 너무 일찍 치는 게 아니냐는 현실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다. 분당과 타협의 중대 기로에 선 박 전 대표 진영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출구전략 추진설을 따라가 봤다.
최근 들어 6·2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친박 계열 예비후보들의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8대 총선의 ‘어처구니없는’ 공천 결과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인지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주류의 공천 전횡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종시 전쟁 결과에 따라 공천의 향방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친박계 후보들은 이번 전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지방자치단체장 도전에 나선 한 친박계 후보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끝까지 원칙을 가지고 세종시 전쟁에 임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걱정도 많다. 이렇게 비타협 일변도로만 나가서 승리해봤자 상처뿐인 영광 아니겠는가. 세종시 전쟁에 진 친이계가 그 반작용으로 지방선거 공천에서 친박계를 왕따시킬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 설령 공천을 받는다 하더라도 박 전 대표가 끝까지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한다면 수도권의 친박계 후보들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본다. 최근의 수도권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이 정체 내지는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는 점도 걱정스럽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 밑에 딸린 후보들의 현실적 어려움도 해결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이런 기류를 보면 지방선거에 목을 맨 일부 친박 후보들이 일방차선으로만 가는 박 전 대표에게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는 상황은 선거가 임박할수록 더 가시화될 전망이다. 친박 진영 일각에서 ‘우리도 출구전략을 논의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것도 지방선거와의 상관관계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류는 지방선거 공천 빅딜설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출구전략’을 전격 가동, 대국민 성명을 통해 극적으로 수정안에 대한 타협안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지방선거의 공천 지분을 대거 확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박 전 대표의 정치적 가치관과 전혀 맞지 않다. 박 전 대표는 지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 여론조사 지지율을 대의원 표로 환산할 경우 본인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만든 원칙을 그대로 지켜 결국 패배한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죽어도 원칙은 지키겠다’는 게 박 전 대표의 절대적 가치관이라면 ‘세종시-지방선거 공천 빅딜설’은 친박 계열 후보들의 희망 섞인 ‘음모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 전 대표로서는 패배를 알면서도 또 다시 불에 뛰어들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국민도 속고 자신도 속은’ 공천 학살을 경험한 그가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세종시 몽니’라는 자충수 때문에 또 다시 학살을 당한다면 그의 지지층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친박 중진들 일각에서는 “자신의 아름다운 원칙만 중요한가. 지금까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 끝까지 원칙만 외칠 건가. 그러다 전부 물에 떠내려가면 그때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세종시 정국 피로증으로 박 전 대표의 ‘알 카에다식 옥쇄작전’이 한계상황에 봉착, 어쩔 수 없이 출구전략 카드를 빼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최근 청와대가 수정안 당론 변경 가능 의원 수 113명 확보에 부쩍 자신감을 내비친 대목이나 강제당론 추진보다 중진협의체 구성 등을 통한 타협에 무게를 두는 것도 박 전 대표의 일방적인 반대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감지한 친이계의 ‘공간 파고들기 전략’이라는 것이다. 친이계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가 지방선거 공천이 임박한 시점에 ‘어쩔 수 없이’ 극적 타협을 위한 무대로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최근 들어 중립파 의원들이 어떻게 해서든 타협안을 도출해내자고 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박 전 대표의 타협 없는 반대가 점점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야당생활을 했던 그들로서는 불확실한 미래권력보다 확실한 현재권력에 붙어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친박 진영에서는 박 전 대표의 두 번째 기자회견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박 전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단 한 차례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난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친박 공천학살’이 일어나자 3월 23일 기자회견을 열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결국 총선의 친박 바람으로 연결됐고 자신의 정치적 터전을 지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바 있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3월 말경을 전후해 1년 만에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수정안(타협안) 전격 수용’과 친박의 내각 참여 같은 국정의 대대적 쇄신 등을 주문한다면 그 자체로 국정 갈등의 최후 해결자라는 강렬한 인상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 이는 박 전 대표의 대권가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훌륭한 정지작업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친박 진영에서 출구전략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까닭은 결국 차기 집권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구 민주계 출신 친박 의원들과의 만남에서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을 만들 수는 없지만, (특정인을) 안 되게 할 수 있다”며 자신과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일화도 소개했다고 한다. 현직 대통령의 차기 주자 견제는 실제로 막강한 영향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친박 중진 일각에서 계속 “정권에 대한 협조를 통해 권력을 만드는 게 안전한 길”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현재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최근의 세종시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짙어지고 있다. 친박 진영 일각에서는 ‘과연 친박 단독으로 정권 수립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들이 계속 “현직 대통령의 위상도 세워주고 차기도 보장받는 쪽으로 ‘출구전략’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라고 주장하는 것도 현재권력의 태클을 피하면서 대권으로 안전하게 가는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진영의 ‘매파’는 오히려 출구전략과는 정반대인 초강경 모드로 진입할 태세다. 지금까지 박 전 대표가 한 번 결심한 사안에 대해 번복했던 전례가 없었고, 온갖 막말까지 오간 현 시점에서 다시 화해모드로 돌아갈 명분이 약하다는 점을 들어 차라리 막판까지 몰리면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던지자는 강경책 목소리가 더 높다. 이런 강수의 배경에는 이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로 볼 때 박 전 대표가 끝까지 당론에 따르지 않을 경우 당 차원의 징계를 줘 대선 후보 박탈까지 하는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점에서 현 시점의 출구전략 논의 움직임은 지방선거에 목이 마른 일부의 조급증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중도파를 중심으로 세종시 절충안이 탄력을 받으면 받을수록 탈레반식 옥쇄작전이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자연스럽게 출구전략도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
사실 박근혜 전 대표는 자신의 ‘출구전략’을 이명박 대통령의 강압에 의한 굴복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대선 후보 경선 때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알면서도’ 패배의 길을 택했던 그가 쉽고 편안 길로 갈 리도 만무하다. 하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사의 최고 명언이 “지는 게 이기는 길”이라는 점에서 친박 진영의 출구전략 검토는 ‘박근혜의 내공’을 시험하는 절체절명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