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대회 열기로 뜨겁던 지난 6월 최태원 회장이 회사 임직원들과 함께 붉은악마로 깜짝 변신, 시청앞 광장에 모여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다. | ||
그는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다정다감하다. 이같은 성격은 집안 내력이어서 4촌인 최신원 SKC 회장이나 최창원 SK글로벌 부사장,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 등도 비슷하다. SK그룹 관계자들은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경천동지할 긴급사안이 아니면 최태원 회장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게 불문율로 돼 있다. 긴급 사항이 발생해 연락을 취해도 연결이 잘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가급적 공휴일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의 가족사랑은 여느 가장 못지 않다. 주말이나 공휴일까지 일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게 최 회장의 생활관이다. 최 회장은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거리에서 농구를 즐기거나 등산을 한다.
부친 최종현 회장처럼 그도 골프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가끔씩 아이들과 함께 경기도 이천에 있는 가족농장을 찾아 하루를 보내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포켓몬이나 디지몬 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이들과 영화 <매트릭스>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을 보고 미래사회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장시간 토론하기도 할 정도다. 1남2녀의 아버지인 최 회장은 평소 자식들에게 세 가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기본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원칙은 첫째 진정한 능력은 재물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것, 둘째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 셋째는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부친 최종현 회장이 생전에 자식들에게 가르친 것이기도 했다.
최종현 회장은 “내가 물려주고 싶은 것은 재산이 아니라 지식이다. 지식이 있으면 재물은 따라오지만, 지식없이 재물만 있으면 그 재물은 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이 1남2녀의 자녀들에게 강조하는 습관은 ‘기록’과 ‘책읽기’라는 두 가지다. 그가 말하는 ‘메모’는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나중에 데이타로서의 가치를 가질 정도로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적는 것을 의미한다. 최태원 회장의 가족사랑은 그에게만 두드러진 것은 아니다.
SK가(家)를 아는 사람들은 고 최종건 회장이나 최종현 회장도 가족의 화합에 대해서는 남달랐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업상 일이 바빠도 가족 행사는 반드시 참석할 정도였다. 1973년 작고한 최종건 회장은 생전에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는 조카들 선물까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챙길 정도였다.
최종현 회장도 생전에 조카들을 친아들보다 더 챙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가풍 때문인지 지금도 2세들은 ‘화목’을 가장 먼저 앞세운다. 이에 대해 최신원 SKC 회장은 “형제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우리 집안의 가풍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잘라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두 사람을 든다. 부친 최종현 회장과 시카고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지도교수였던 게일 존슨 교수다. 그는 이들을 꼽는 이유에 대해 “아버지(고 최종현 회장)는 내 인생의 정신적 스승이고, 존슨 교수는 내게 살아가는 방법과 인생의 진정한 가치관을 정립시켜준 분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의 인생관과 경영관에 많은 영향을 준 책으로 1990년대 미국 경제계에 리엔지니어링 붐을 일으켰던 마이클 해머의 <아젠다>와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가 저술한 <미래 충격>을 꼽는다. 특히 그는 기업경영 혁신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해머의 ‘아젠다’는 몇번이나 반복해 읽었을 정도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 SK(주)와 그룹에서 발간하는 회사내 사보에 연재해 임직원들이 모두 읽도록 권유했다.
재계에는 ‘SK그룹 오너 일가족은 전통적으로 부인에게 약하다’는 우스개가 있다. 최 회장 집안의 가족사랑이 남다르다는 뜻이다. 사실 최종현 회장도 부인 박계희 여사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박 여사는 남편을 간호하다 병이 도져 1년 앞서 작고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최 회장은 작고할 때까지 부인을 못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태원 회장 역시 부인 노소영씨에 대한 사랑이 여느 부부 못지 않다.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맡고 있는 부인과는 주말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함께 외식 등을 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얼마전 항간에 최 회장 부부에 관해 근거없는 소문이 나돌았던 적이 있다.
당시 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 소문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는 “최 회장의 성격이나 가풍을 알면 그런 얘기는 나올 수 없을 것”이란 설명이었다. 최 회장의 사고방식은 오랜 미국 유학생활 탓인지 합리적이며, 효율성을 중시하고 있다. 비생산적이거나, 형식적 요소는 배제하고 철저히 논리와 효율에 입각한 의사결정을 내린다. 그가 경영에 몸담은 후 임직원들에게 캐주얼 복장으로 근무하도록 권장한 것도 이같은 합리성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꽉 조인 넥타이를 매고 근무하는 것은 창의력과 사고를 경직시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그는 공식적인 행사 때가 아니면 가급적 양복을 입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이 번뜩이는 사람을 좋아한다.
▲ 서울대 공대 대학원에 초빙교수로 출강중인 최태원회장이 산업현장의 생생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 ||
그룹 임원회의에서도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다. 치밀함과 판단력을 갖추되 과거를 답습하기보다는 과감히 위험에 도전(Risk Taking)하는 정신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1998년 3월 SK텔레콤 주총에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SKC&C의 지분 30%를 SK텔레콤에 무상증여한 것은 그가 경영에서도 합리적 판단을 중시하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실례였다.
당시 참여연대는 최 회장의 지분과 관련해 경영투명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SKC&C의 지분이 계속 문제되자 그는 전격적으로 지분포기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지분 취득 과정에 문제는 없지만 주주들의 요구를 존중한다”고 그같은 결정을 한 배경을 밝혔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도 “주주를 중시하는 결단”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최 회장은 1960년 12월3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 최종현 회장은 시카고대 경제학과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62년 귀국할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최종현 회장이 부인 박계희 여사(1987년 작고)를 만난 것은 1958년 봄이었다. 박 여사의 부친은 박경식 전 해운공사 이사장이었다. 그녀는 1953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베네트칼리지, 미시간주 칼라마주대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 미대 응용미술과를 다니고 있었다.
홍사중 전 서울대 교수는 최종현 회장 회고록인 ‘나는 한없이 살았다’에서 “최종현-박계희 커플의 만남은 박 여사의 친구 소개로 이뤄졌으며,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최종현 회장은 박계희 여사를 만난지 1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 후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던 1960년 말 미국에서 첫 아들인 최태원 회장을 얻은 것이다. 최태원 회장은 1979년 신일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부친이 다녔던 시카고대 경제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에서 그가 대부분의 재벌 2세들이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것과는 달리 물리학과를 택한 것은 과학적 사고력을 갖춰야 한다는 부친의 조언 때문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아들이 진학문제로 고민하자 “자신의 진로는 자신이 선택한다. 하지만 어떤 직업을 갖든 합리적 논리를 펼 수 있는 객관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 수학이든 물리학이든 과학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학과를 택하라”고 말했다.
이같은 조언은 최태원 회장은 물론 그의 동생 최재원 SK글로벌 부사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최재원 SK글로벌 부사장은 미국 브라운대 물리학과를 거쳐 다시 스탠포드대 재료공학과를 다닌 뒤 하버드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최태원 회장은 시카고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실리콘 밸리에 있던 메트라(Metra)라는 외국계 회사에서 1년반 정도 일했다.
그가 공부를 마친 뒤 곧바로 귀국하지 않은 것은 당시 맏딸 윤정양의 출산을 앞두기도 했지만, 국내로 들어와 그룹 경영에 합류하기 전 미리 경험을 쌓자는 이유였다. 최 회장이 국내로 귀국한 뒤 터진 외화 밀반출 의혹 사건도 이 시기에 벌어진 일.
이 사건은 당시 신혼이던 1990년 1월 최 회장 부부가 19만달러를 세관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미국내에 반입한 혐의로 미국 검찰에 의해 피소되면서 벌어졌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 스위스은행 계좌설까지 나오면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최 회장 부부는 처음 이 사건이 불거진 이후 1994년 사건이 끝날 때까지 무려 4년동안 시달려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최 회장은 1991년 SK상사 부장으로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SK상사 이사 겸 경영기획실 사업개발팀장, SK상사 상무, SK(주) 상무 등 착실히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최 회장이 그룹경영에 본격적으로 몸담은 것은 1996년 SK(주) 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였다. 그는 SK(주)에 근무하면서 e-비즈니스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인터넷, 통신분야가 미래 경제를 이끌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그는 SK(주)로 옮기자마자 OK캐쉬백 , 엔카닷컴, 텔레메틱스 등의새로운 서비스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1998년 8월 부친이 작고하면서 한때 흔들렸다. 부친의 죽음은 최 회장뿐 아니라 동생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당시 IMF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경제난이 닥친 점도 최 회장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부친이 없는 빈자리는 최종현 회장의 고명을 받은 손길승 회장이 메워 주었다. 최 회장은 직접 그룹의 구조조정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는 1999년 1월 미국 엔론사로부터 2억4천3백만달러의 외자를 유치해 SK엔론(주)라는 한미합작법인을 설립했다.
그 결과 최 회장은 1998년 12월 WEF(World Economic Forum)가 선정하는 ‘차세대 지도자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 회장은 2002년 8월 WEF의 동아시아지역 공동의장에 선임돼 국내외 경제계에서 착실히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원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실전 경영론을 강의하기도 하고, 2002 월드컵 경기 때는 붉은악마가 되어 거리응원에 직접 나서는 등 자신의 이미지 구축에 열성적이다. 젊은 경영인들의 모임인 브이소사이어티(V Society)라는 모임을 주도적으로 구성해 또래의 CEO들과 경영의식을 교류하는 데도 열심이다. 그의 경영수업은 회사 업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학교와 거리와 사교모임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