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부터 돈 세탁까지 ‘브로커 역할’ 갤러리 직원 여럿…이들의 ‘입’ 주목
한 전시회장 모습. 기사와 관련 없음.
미술품이 탈세와 비자금 조성 등에 쓰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현금으로 이뤄지는 거래가 많아 상속이나 증여 수단으로도 종종 활용된다. 과거 굵직굵직한 게이트 사건 때 미술품이 로비용으로 등장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특히 재계를 포함한 유력인사들이 고가의 미술품 거래를 통해 재산을 은닉하고 있다는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미술품 거래 시장을 들여다보게 된 배경이다. 한 친문 의원은 “과거 정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는 것만이 적폐 청산은 아니다. 사회 지도층, 특히 대기업의 고질적인 불법행위를 뿌리 뽑는 것도 문재인 대통령이 누차 강조하는 부분”이라면서 “재벌들이 미술품 거래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사례를 집중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4일 범정부차원의 해외범죄수익환수 합동조사단 설치를 지시하면서 “불법으로 재산을 해외에 도피 은닉, 세금을 면탈하는 것은 반사회행위이므로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6월 22일엔 대검찰청 산하 합동조사단이 출범했다. 미술품 거래를 겨냥한 사정당국의 움직임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풀이된다. 또 다른 친문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미술계가 시장 위축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해 거래의 양성화가 지지부진했다. 이러다보니 온갖 편법들이 동원됐고, 재벌들은 마치 특권인 양 부의 축적을 위해 미술품을 사들였다. 암암리에 성사되는 미술품 거래 규모는 천문학적 수준이다. 이를 수면 위로 올려 투명한 거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회의적 반응도 적지 않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쉬운 일은 아니다. 미술품 거래가 워낙에 음성적으로 이뤄진다. 거래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또 미술품의 정확한 가격 책정도 어렵다. 화가마다, 작품마다, 거래 당사자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동안 검찰이나 과세당국이 여러 번 수사에 나섰지만 그 실체를 제대로 밝혀낸 적은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 정권 사정당국의 한 고위 인사는 “이번만은 다를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미술품 관련 수사가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정확한 거래 실태를 파악하는 게 관건인데,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긴 하지만 갤러리 몇 곳의 미술품 거래 실적을 확보해 의심스런 부분을 발견했다. 계약서에 기재된 액수가 말도 안 되게 낮은 수준이라 허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역추적을 하다 보면 실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정당국이 입수한 거래 내역엔 내로라하는 재벌가 인사들과 유명 연예인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술품 유통업계에서 ‘큰손’으로 거론되는 한 재벌의 경우 특정 갤러리에서만 100개가 넘는 미술품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도 눈길을 끈다.
이 인사에 따르면 몇몇 기업의 내부 고발자로부터도 미술품 거래와 관련된 제보를 받은 상태라고 한다. 회사 돈으로 미술품을 구매하거나 미술품을 활용한 자금 세탁 과정에 계열사가 동원됐다는 의혹을 뒷받침할 자료들이다. 사정당국의 칼날이 재계로 향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의혹에 휩싸인 갤러리 중 한 곳의 관계자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우리 쪽은 일반 거래는 아예 안 하고 재벌들만 상대한다. 전시는 따로 하지 않고 물건이 들어오면 고객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을 해서 판매하는 시스템이다. 일반인들은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이라면서 “세부적인 내용은 관장과 회계 책임자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구체적인 사례도 소개했다. 또 다른 재벌가의 한 인사는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 일부를 해외에서 팔아달라고 요청했다. 미술품이 해외로 반출될 때 별다른 제재가 없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이 관계자는 직접 미술품을 해외로 들고 나가 미리 약속한 현지 구매자에게 팔았다. 수고료를 뗀 판매 대금은 재벌가 인사의 차명계좌가 개설된 제3국 금융기관에 예치했다. 이 관계자는 “떳떳하게 구매한 미술품이라면 굳이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쳤겠느냐”라고 반문하면서 “해외에서 미술품을 거래하는 일은 추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종 이런 작업을 요청받는다”라고 전했다.
또 다른 갤러리의 경우 소속된 직원이 미술품을 통한 비자금 세탁 전문가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가 직접 관리하는 명단 중에도 재벌가 등 유력인사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미술 전시를 관람하는 모임을 통해 친목을 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의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사실상 브로커나 다름없는 일을 하는 갤러리 직원들이 여럿 있다. 미술품 거래를 통해 깔끔하게 돈 세탁까지 마무리해주는 역할이다. 그들이 입을 여느냐가 이번 수사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