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민당 대선후보 정주영이 대규모 유세를 펼치고 있다. | ||
이미 아버지 정주영의 ‘대권도전’은 스스로 설정했던 인생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한 경구를 처음으로 좌초시켰던 ‘실패’였을 뿐 아니라, 한국 재계 내부에서조차 ‘거대재벌이 국가 최고권력까지 모두 장악하게 되면, 한국의 현실적 정경풍토 속성상 나라장래와 공정 시장경제 체질 및 경제선진화에 역기능이 더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자성론(自省論)을 일게 했던 것이 사실.
한국재계사 최초로 재벌 1·2세에 걸친 이같은 ‘대권행보’는 정주영 성장드라마를 수없이 수놓은 ‘시련의 벽’ 실험중 백미(白眉)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벽은 슬기롭게 뛰어넘고, 어떤 벽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는 것이 주변의 대체적 평가. 정주영과 현대가 그룹 세계화의 과정에서 오늘이 있기까지 간단없이 부닥쳤던 굵직한 ‘시련의 벽들’을, 대권도전 결단과 금세기 최대 공사 주베일 현장, 세계최대 조선소 파산위기 등 대표 사례를 중심으로 짚는다.
‘정치인 정주영’ 에 대한 평가는 ‘경제인 정주영’과는 달리 거의 부정적 측면이 대세를 이룬다. “정 전 회장이 대권에 도전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파 전문 경제인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더라면, 더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 이라는 ‘교훈론’이 일반적인 진단.
정 전 회장은 92년 1월부터 93년 2월 정계은퇴 때까지 1년여 동안 짧지만 파란만장한 정치를 했다. 정치권에서 ‘CY’로 불렸던 그는 통일국민당을 창당, 92년 3월 총선에서 31석을 얻어 대권에 도전했으나 숱한 시련속에 결국 고배, 본인과 현대그룹 자체에 많은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현직 정치권 관계자들의 시각부터 들어본다. “정 전 회장은 성공적 기업인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선 실패했다. 정경유착과 정치보복의 문화가 있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 기업 등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대권에 도전한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다.”(한나라당 의원 김문수)
“경제인도 물론 정치를 할 수는 있지만 정경유착이 큰 문제가 되는 풍토에서 재벌 총수가 대권까지 도전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른 경제인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민주당의원 조순형)
현대측 관계자들의 실토도 유사하며 좀 더 구체성을 띤다. 측근 K전임원의 자성적 고백. “우리는 대선에서 그룹전체를 동원하고 몰아붙여 당선가능선인 9백만명의 당원을 순식간에 만들었고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마음은 건설현장의 벽돌처럼 고정돼 있지 않았다. 정 회장이 쌓아온 부(富)와 사업하듯 하는 정치행태에 부정적 시각이 불어만 갔다.
정 회장이 대선에서의 실패를 ‘실패가 아니라 시련’으로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물론 ‘만약 그것이 실패라 하더라도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는 신조로 임했을 것이다. 이를 실패로 인정치 않았고, 시련 정도로 보았다면, 그것은 아들 몽준씨를 자신이 못다 이룬 대권에의 꿈을 향한 후계자로 계속 상정하고 움직였던 것과 연관이 있다.”
▲ 아버지 정주영의 유일한 실패였다고 할 수 있는 대권도전 의 ‘유업’을 아들 정몽준은 이뤄낼 수 있을까. 이번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했던 정몽준 의원. | ||
그러나, 부친인 정주영씨의 전례에서 보듯 재벌의 대권도전을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은 상당하다. ‘우리의 정치 경제적 현실풍토에서 볼 때 후유증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게 정·재계 지도층내부의 솔직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씨 일가가 세습적으로 이를 관철해 내려는 데는, 국가적으로도 바람직스럽지 못한, 부작용이 뒤따를 가능성이 많다.”
정치참여 결심에 이어 정주영의 일생에서 가장 높았던 또다른 ‘시련의 벽’으로는 20세기 최대의 주베일 공사현장 상황. 국내는 물론 국제 건설업계에서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던 이 난공사를, 아무 경험도 없었던 정주영과 현대는 실제 어떻게 뛰어넘어 갔는가. 이 대역사는 시작부터 시련의 연속이었으며,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무경험으로 미지의 공사를 밀고 나가야 했기 때문에 수반됐던 정신적, 기술적 양면의 고초였다고 당시 참여했던 현대측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사우디의 공사발주처와 감독관청은 현대의 기술 능력에 대한 불신과 인식부족으로 사사건건 감독하고자 했고, 브라운 앤드 루츠사의 장비를 빌려 쓰면서 그 아니꼬움과 울화통 터지는 서러움을 철저하게 맛보았던 것은 공사기간 내내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초라는 것. 그보다도 현장에서 더없는 어려움을 가중시킨 것은 기술적 암초. 당시 기술관계자의 대표적 기억담.
“제일 큰 현안으로 떠올랐던 것은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바닷속에다가 정확히 박아 넣는 일이었다. 공기를 단축시켜야 그나마 돈이 남는 것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정 회장은 중동 공사현장이 아닌 한국의 울산에서 제작한 철골 구조물을 커다란 바지선에 실어 직접 수송해 오기로 결정했다.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2천 킬로미터, 경부고속도로를 열다섯 번 왕복하는 거리다. 바지선 한 척이라도 전복, 또는 다른 배와의 충돌 사고라도 나면 계획은 완전히 치명적인 실패로 끝날 것이고, 정주영의 무모함은 세계적 웃음거리가 될 판이었다. 사업자체가 종막을 고할지 몰랐다. 그러나 정 회장은 무모하면서도 치밀했다. 결국 현대는 이를 오차없이 실행해냈다.”
또다른 ‘시련의 벽’으로는 제3공화국의 범국가적 개발프로젝트로 성공한 현대조선 건설 이후의 오일쇼크로 인한 파산위기. 1973년 10월, O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가 원유가를 17% 올리면서 세계 경제를 강타했다. 각국의 자원무기화는 일제히 벌어졌고, 세계 경제의 침체는 국가간 교역 물량을 격감시켜 세계 해운업계에 최악의 불황을 몰아왔다. 이는 곧장 세계 최대 조선소를 자임했던 현대조선에 밀어닥쳤다.
이로 인해 현대조선이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던 것. 결국 이 위기는 수주계약 취소에 대한 현대측의 끈질긴 국제소송 제기와 승소, 그리고 자체 물량소화를 위한 해운업진출 결단으로 겨우 벗어나지만, 정주영과 현대의 진로에 더없는 고통을 안겨준 중대 고비로 회자된다.
정주영의 일생에 벌어졌던 절체절명의 굵직한 시련의 벽들. 그 벽들에 대해 정주영은 이런 말을 남긴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체득한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시련의 연속이며 연속되는 시련과 싸우면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공인 정주영이 남긴 업적에는 이같은 시련과 도전의 강도 만큼, 한국사회와 그 자신의 ‘어둠과 빛’이 그 누구보다 깊게 드리워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