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밀리면 ‘맏형’ 입지 흔들
▲ 유시민 전 장관, 김진표 최고위원 | ||
민주당 경기지사 후보로 유력한 김진표 최고위원은 지난 3월 11일 긴급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유 전 장관의 경기지사 출마 선언이 있은 다음날이었다. 그는 간담회 내내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자들 질문에 중언부언했고, “기호 8번이 되면 경기도 내 다른 민주당 후보들은 곤란해진다”며 야권 선거연대 정신을 부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민주당 수도권 선거 전략에 적신호가 켜졌다. 국민참여당 소속인 유 전 장관이 경기지사 출마를 공식화한 뒤로 경기도 판세가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 광역단체장 후보는 어느 한 곳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민주당으로선 유 전 장관의 경기지사 출마가 악재 중 악재인 셈이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서울은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고, 인천도 ‘필승카드’인 송영길 최고위원이 출마 여부를 확정짓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그나마 마음 편히 후보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경기도까지 유 전 장관의 갑작스런 출마로 시계제로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자칫하다간 ‘범야권의 맏형’인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제대로 후보를 내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선거기획을 주도하고 있는 민주당 ‘386 전략통’들은 당혹감이 역력하다. 한 386 인사는 “한마디로 서울시장 출마 연기만 피워댄 참여당과 유 전 장관에게 당했다”며 “‘큰 꿈’을 꾸고 있는 유 전 장관이 경기지사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이 같은 방향 선회를 미처 가정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유시민 효과’는 당장 경기도 내 민심 기류도 급변케 하는 모양새다. 최근 야권의 한 후보 캠프에서 경기도민을 상대로 벌인 자체 여론조사에서 참여당 지지율은 8%로, 종전보다 5%p(포인트)가량 급반등했고 유 전 장관의 지지율은 22.0%로 한나라당 소속 김문수 현 지사(50.4%)에 이어 단숨에 2위까지 치고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전략공천을 기대하며 느긋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던 김 최고위원은 유 전 장관 출마 직후 10% 미만으로 지지율이 급전직하했다.
더 심각한 것은 민주당 지지층도 유 전 장관의 ‘가능성’에 점수를 줄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 앞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층만을 따로 떼어내 후보별 지지율을 살펴본 결과, 유 전 장관은 33.0%, 김 최고위원은 22.3%의 지지를 받아 ‘김문수 현 지사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자’는 기대심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유시민 쇼크’로 민주당이 경기지사 선거전략을 전면 재정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송영길 최고위원(왼쪽)과 정세균 대표. | ||
당의 한 관계자는 “김 최고위원은 그동안 ‘친노무현 그룹’의 일원으로 자처하며 참여당에 대해 비판도 가급적 삼갔던 사람”이라며 “막상 자기가 다급해지니까 참여당에 한껏 날을 세우고 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비주류를 대표해 경기지사에 도전장을 낸 이종걸 의원은 의외로 반기는 모습이다. 선거가 뜨거워질수록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의원은 참여정부 때 경제·교육부총리를 지내 친노그룹으로 분류되는 김 최고위원이 같은 친노 고리로 묶이는 유 전 장관에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긴 어렵다는 ‘맹점’을 파고들 기세다.
아울러 ‘유시민 쇼크’가 민주당 내홍을 촉발하는 뇌관이 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주류·비주류 간에 유 전 장관 출마를 저지하지 못한 책임을 두고 공방이 벌어질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비주류 측 한 관계자는 “정 대표부터 386 측근인사들 태반이 지방선거 승리보다 7월 전당대회 당권 장악에만 매몰됐던 탓”이라며 “경기도를 유 전 장관에게 내주면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다시 불거질 야권 통합·연대과정에서 민주당 입지는 급격히 좁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참여당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다. 정 억울하면 “유시민보다 더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면 될 것 아니냐”(양순필 대변인)며 민주당의 신경을 자극하기도 했다. 또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누누이 ‘(야권 선거연대는) 연대 자체보다 선거승리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얘기했듯이 지지율이 가장 높은 후보로 단일화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참여당 관계자)이라며 유 전 장관으로의 단일화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유 전 장관도 지난 3월 11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여러 여론조사를 보면 내가 (야권에서) 가장 높게 나온다. 지금 현재 추세로 보면 민주당 내에서조차 이길 수 없다는 의견이 팽배할 정도”라며 “저로 합의해주시면 제일 바람직한 것”이라고 거들었다.
이에 따라 민주당도 경기지사 선거 전략을 전면 재정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 전 장관의 지지율이 김 최고위원이나 이 의원을 모두 압도하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흥행거리’를 만들지 못한다면, 결과는 해보나마나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여론조사 방식 대신 흥행성 면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국민경선’으로 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졌다”며 “유 전 장관이 완주 의사를 밝힌 이상 어떻게든 그에게 쏠린 시선을 민주당 후보에게로 돌려놔야 한다”고 말했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