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우리가 몰랐던 독립투쟁사3(끝)-광복군 그리고 국군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당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광복군사령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어디일까. 현재 국방부는 우리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두고 있다고 밝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방부 장관에 광복군 참모장 출신 이범석 장군을 임명했고, 국군 8개 사단 중 4개 사단장과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광복군 출신이 맡았다. 특히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은 “대한민국 국군은 독립군과 광복군 역사의 계승자”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독립군의 역사를 우리 군 역사에 편입하는 것을 검토하라 지시했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지난 2월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책자를 발간했다. 국방부 공식 간행물로는 처음으로 독립군과 광복군을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해 국군의 정통성을 되살린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우리 군은 독립군과 광복군을 주축으로 창설돼 이어져온 것일까. 문재인 정부의 지시와 달리 8·15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친일’ 인사가 육군의 요직을 차지해왔다.
해방 후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던 미 군정은 임정 요원들과 광복군을 무장해제한 채 개별 귀국하도록 했다. 이에 광복군은 1946년 5월 16일 “여러 해 동안 항전복국의 정신으로 싸워오던 광복군은 일본의 항복으로 중국에서의 작전임무는 완료되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복원한다”는 ‘한국광복군 복원선언서’를 남기고 공식해체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한국 땅에는 이미 크고 작은 군사단체들이 난립해있었다. 일제 당시 징병 당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국군준비대를 비롯해 학병동맹, 해방병단, 육해공군출신동지회 등 남한에만 90여 개에 달하는 군사단체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단체들은 각자 “새로운 독립국가의 군대”를 표방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창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 군정은 이러한 단체들의 움직임이 상황을 어지럽힌다 판단해 용인하지 않았다.
결국 1946년 미 군정은 국방경비대를 설치, 기존 단체들 중 문제가 있는 단체는 해체해고, 온건한 군사단체는 흡수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발전한다. 이어 지휘관이나 참모가 될 수 있는 장교를 교육하기 위한 군사영어학교를 열었다.
문제는 이 당시 국방경비대에 흡수된 이들 중에는 일본군이나 관동군 등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인 일본 육군 출신자는 39만 명인데 비해, 광복군 출신은 일본군에서 복무하다가 도망친 사람까지 합쳐 3만 5000명에 그친 이유도 있었다.
특히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군 경력자 상당수는 일본군이나 만주군, 관동군 출신이었다. 이러한 미 군정의 정책에 반발해 한국에 귀국한 광복군들은 입대를 대거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종사자들과 같이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한국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이 통위부 장관(미 군정 국방장관)에 오르자 광복군 출신들은 대거 장교와 부사관으로 육군에 입대했다.
그럼에도 일본군·만주군 인사들이 먼저 군에 진입함으로써 이들이 육군의 요직을 차지하게 됐다. 군사영어학교 110명의 교육수료자 가운데 87명은 일본군, 21명은 만주군, 2명은 중국군 출신이었다. 110명 중 108명이 일본군과 만주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이들었던 것. 이들이 한국 육군 창군의 주역이 됐고, 6·25 전쟁을 이끌었다. 이 중 1948년 이응준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최초로 장성으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총 78명이 장성으로 별을 달았다.
물론 임정 및 광복군 출신 국군 수뇌에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 손호성 초대 육군총사령관, 최용덕 공군 총참모장, 손원일 초대 해군 총참모장, 김홍일 육사교장, 안춘생 장군 등이 기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육군 최고 수뇌부에는 진입한 적이 없고, 홀대 받았다. 초대 이응준 준장을 비롯해, 채병덕 소장, 신태영 소장, 정일권 중장, 백선엽 대장 등 1대부터 18대까지 육군참모총장 전원이 일본군, 만주군 출신인 것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친일’ 인사가 군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그동안 국군사 연구도 경비대를 국군의 기원으로 보는 ‘경비대모체론’이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특히 한국전쟁 뒤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반공세력이 득세하고 항일세력이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국군의 광복군 정통성 계승 노력이 약화되거나 변질됐고, 구군부·신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국군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더욱 훼손됐다고 한다.
일제 관동군 산하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한 박정희 전 대통령.
이러한 역사를 걸어온 대한민국 국군이 과거를 극복하고 독립군과 광복군을 정통성으로 되살릴 수 있을까.
한국광복군동지회 관계자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적혀있다. 따라서 국군의 뿌리도 만주군·일본군이 주축이 된 국방경비대보다는 임정의 군대인 광복군으로 보는 게 맞다. 국군의 날을 9월 17일 광복군 창설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다만 “국군의 뿌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 군 역사의 친일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입장이 분분하다”고 덧붙였다.
우당 이회영 선생을 중심으로 설립된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하는 연구도 있다.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측은 이범석 장관과 김원봉 중앙육군군관학교장, 송호성 총사령관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 광복군 인사들이 국군 창설 때 주요 간부를 맡은 만큼 독립군-광복군-국군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이 뒷받침된다는 것이다.
실제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지난해부터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육사 뿌리 찾기 연구에 골몰하고 있다. 김완태 육사교장(중장)이 “육사는 독립군과 광복군의 숭고한 가치와 정신을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3월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인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육사에 세워졌다.
앞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역시 우리 국군의 정통성을 더욱 확장시키는 취지에서 발간됐다. 저자인 심헌용 선임연구원은 “군의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게 아니다. 광복 이전 독립군·광복군의 국군 정통성 평가 연구가 부족해, 이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연구가 진행됐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 군의 해산 반대와 항일구국 의병전쟁, 독립군과 광복군의 독립전쟁이 엄연한 우리 군의 역사라는 점을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증명했다”고 설명했다.
국방경비대 ‘친일’ 인사 장악 문제에 대해서 심 연구원은 “국방경비대 인적 구성이 광복군 출신에 비해 일본군과 관동군 출신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광복군의 정통성을 인정하며 자숙의 시간을 갖다가 미 군정이 1946년 1월 국방경비대를 설립하자 참여하게 됐다”며 “미 군정도 광복군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방사령부를 통위부로 바꾸면서 광복군 참모총장 출신 유동열을 임명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에 광복군 편련국장 출신 송호성을 임명하여 인적 계승을 시도했다. 대한제국과 광복군의 군제와 계급체계 등을 혼용 계승함으로써 역사적 인맥과 군맥을 잇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의 국군체제 확립에도 그대로 계승됐다”고 밝혔다.
이어 “만주군·일본군 중심의 초기 국군 수뇌부 ‘친일’ 논쟁에 대해 본 연구소는 답할 입장에 있진 않다. 가치판단 없이 객관적 사실만 정리했다”며 “다만 논쟁은 소모적이어야 하지 않고 건설적이어야 한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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