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민스 노’ 도입 전엔 처벌도 노!”…새로운 증거 없다면 피해자 측에 불리
이날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피감독자 간음·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강제추행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 씨가 주장한 “위력에 의한 원치 않은 성관계”는 법정에서 끝내 인정되지 않았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환호성이, 여성단체 사이에선 탄식과 울분이 터져 나왔다. 법원 밖에서는 각 단체 회원들끼리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검찰과 김지은은 항소를 다짐했고,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안 전 지사는 다소 홀가분해진 얼굴로 법정을 나섰다.
지난 14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피감독자 간음·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강제추행 혐의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사진=임준선 기자
이처럼 ‘대선 잠룡’으로 불릴 정도로 유력했던 정치인을 몰락시킨 정치계 대형 ‘미투(Me Too)’의 첫 판결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법조계에서는 “재판부가 성폭력에서의 위력을 너무 좁게 해석했다”고 지적하면서도 “현행 국내 법 체계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날 재판을 담당한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조병구)는 “이 사건에서 피고인(안희정)이 위력을 행사해 피해자(김지은)의 자유의사를 제압한 후 간음 및 추행행위를 저질렀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김 씨가 어느 정도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거절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는 점은 인정했으나, 현재 우리 성폭력범죄의 처벌 체계 하에서 이런 사정만으로는 안 전 지사의 행위를 처벌의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열린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선고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무죄에 대한 항의를 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안 전 지사의 위력이 김 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안 전 지사는 “성관계는 있었으나 강압이 아닌 합의 하의 관계”를 내세웠고, 김 씨는 “제왕처럼 군림하는 안 전 지사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며 원치 않는 성관계에 그의 지위와 권세에서 비롯된 위력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유력 정치인이라는 점,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지위 및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김 씨의 임면 등 권한을 가지고 있어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죄에서 위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력의 존재감만으로 김 씨나 충남도청 직원들의 자유의사를 억압하거나, 실제로 이를 행사해 왔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현행법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현행법상 성폭력범죄 처벌의 체계는 폭행, 협박, 위력의 행사가 존재해야만 처벌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씨의 주장과 같은 안 전 지사의 위력이 법정에서 부정된 이상, 객관적인 증거가 없이 피해 진술만을 가지고 그의 범죄를 처벌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
이 점에 대해 재판부는 폭행, 협박, 위력이 없더라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관계를 가졌을 때 처벌하는, 이른바 ‘노 민스 노(No Means No)’ 룰이나 명백한 동의를 얻지 않은 성관계를 모두 강간으로 판단하는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룰을 언급했다. 이런 체계가 도입되지 않은 현행법으로는 안 전 지사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하고, 이는 사법부가 아닌 입법부가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권력형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서울서부지법을 나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익명을 요구한 한 성범죄 전담 변호사는 앞으로의 항소심에 대해 “관건은 두 가지다. 항소심 재판부가 안 전 지사의 위력을 액면 그대로 인정할 것인지, 그리고 김 씨가 그로 인해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세뇌 또는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라고 짚었다.
이미 1심 재판부에서는 안 전 지사의 위력이 현행법상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고 성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즉, 이 사건 공소사실에서 지적되고 있는 안 전 지사의 ‘범행’은 김 씨의 성적자기결정권에 따라 결정된 관계로 인정됐다는 것이다.
만일 항소심에서도 위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피해 후 김 씨의 심리적 무기력 상태 또는 세뇌 상태’ 여부에서 판단이 갈릴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변호사는 “아는 사람, 또는 자신이 굳게 믿은 사람으로부터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대다수는 현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감싸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자신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미안하다, 실수했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라 실수를 저질렀을 뿐인 사람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피해로 인한 심리적 충격이 만들어낸 방어 기제”라고도 덧붙였다.
김 씨 역시 안 전 지사를 “내가 지켜야 할 분, 하늘”이라고 지칭하고, “지사님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라며 무한한 신뢰를 보여 왔던 바 있다. 그처럼 안 전 지사에 대한 신뢰가 높고 굳건했던 김 씨라면 상습적인 범행을 당하면서도 그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 씨가 상습적으로 피해를 당한 이후에도 수행비서로서 안 전 지사를 충실히 수행해온 것도 ‘합의 하의 관계’였기 때문이 아니라 안 전 지사가 구축한 이미지와 개인적 신뢰감에 따른 세뇌 상태였기 때문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이와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질 것인지는 미지수다. 1심 재판부는 김 씨에 대해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결코 낮지 않다”고 판단했다. 김 씨의 내심이나 심리상태를 떠나서 안 전 지사가 위력으로 그를 제압했다고 볼 수 있는 사정이 전혀 없었으며, 김 씨의 진술이 신빙성이 떨어지고 제출된 증거들과 어긋나는 점 등을 종합하면 그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 있었다고도 단정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항소심 재판 역시 김 씨에게 상당히 어렵게 진행될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재판부가 피해자 진술을 신뢰 못한 이유? ‘왜 굳이 객실 옮겨 같은 동 숙소에…’ 재판부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무죄를 선고한 데에는 위력의 판단 여부도 있었지만 피해자 김지은 전 충남도 정무비서의 진술 신빙성을 부정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상습 강제추행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이러한 공소 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증명’돼야 했지만,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고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먼저 첫 성폭행 사건이 있었던 지난해 7월 30일 러시아 출장과 관련한 피해자의 진술을 지적했다. 김 씨가 피해 사실을 전임 수행비서인 신 아무개 씨에게 호소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김 씨의 진술과 신 씨의 증언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 성폭행 사건 당일 저녁 안 전 지사와 함께 와인바를 간 점, 그 이튿날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하려고 애쓴 점, 귀국 후에는 안 전 지사가 머리를 했던 헤어숍에 찾아가 같은 미용사에게 머리 손질을 받은 점 등을 종합하면 김 씨가 말한 ‘위력에 의한 성관계’ 이후 피해자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다소 괴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김 씨는 “성폭행 피해를 잊고 수행비서로서 안 전 지사를 열심히 수행하려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씨가 사건 이후에도 “굳이 가식의 태도를 취할 필요도 없이 친하게 지내는 지인과의 상시적인 대화에서도 지속적으로 피고인을 지지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어 지난해 9월 스위스 출장 중에 발생한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서 피해자가 객실을 교체해가며 피고인이 머무는 동에 숙소를 잡은 점, 이 당시 피해자가 이미 전임 수행비서에게 피해사실을 호소했고, 그도 피해자에게 피고인의 객실에 들어가지 말라는 조언을 했음에도 객실에 들어가 성폭행 피해를 입은 점, 성폭행 피해 사실을 전화 통화로 호소했다는 피해자의 진술과 달리 실제 통화내역의 시간대가 일치하지 않는 점 등을 종합해 “피해자의 진술에 의문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앞서 논란의 중심이 됐던, 김 씨가 새벽 4시에 안 전 지사 부부의 침실방에 침입했다는 이른바 ‘상화원 사건’과 관련해서도 김 씨의 해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당시 안 전 지사의 부인 민주원 씨는 “새벽녘 잠에서 깨 보니 김 씨가 침대 맡에 서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김 씨는 “침실 밖 복도를 지키고 있었을 뿐 침실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던 바 있다. 재판부는 상화원 침실 구조가 방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지 않고서는 침대 맡에 서 있을 수 없다는 점, 이후 김 씨가 이와 관련해 민 씨에게 사과를 했다는 진술 등을 종합해 “김 씨의 해명이 객관적 증거에 어긋나거나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판단했다. 앞서 범죄 행위에 대한 안 전 지사의 위력이 모두 인정되지 않았고, 유일한 증거인 김 씨의 증언마저도 그 신빙성이 부정되면서 결국 안 전 지사의 1심은 “공소사실 전부에 대하여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무죄 판결로 이어졌다. [원] |
“악마 상사들에 ‘허용 면허’ 준 셈” 여성단체 반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무죄 판결을 두고 피해자 김지은 전 충남도 정무비서와 검찰이 모두 항소심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특히 선고 당일이었던 14일에는 김 씨의 재판을 지원해 왔던 여성단체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부를 규탄하기도 했다. 서울서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부장검사 오정희)는 14일 입장문을 내고 “법원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무죄를 선고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일관되게 진술했고, 피고인의 요구에 거부 의사를 표시했을 뿐 아니라 피해 사실을 여러 사람에게 호소했다. 인적·물적 증거에 의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됨에도 법원은 달리 판단했다”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날 선고기일에 참석했던 김 씨 역시 입장문을 내고 “지금 이 부당한 결과에 주저앉지 않겠다. 제가 굳건히 살고 살아서, 안희정의 범죄 행위를 법적으로 증명할 것”이라고 항소심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특히 김 씨는 입장문을 통해 재판부를 에둘러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무죄 판결은) 어쩌면 미리 예고되었던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씀하실 때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재판부가 성범죄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선입견’으로 재판에 임했기 때문에 무죄 판결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이다. 한편 이날 김 씨를 지원하던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여성단체는 각 지방법원 앞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판결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었다. 이들은 “성폭력 사건의 강력한 증거인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부정하고 업무상 위력에 대한 판단을 엄격하고 좁게 해석했다”며 “온갖 유형력, 무형력을 행사하며 괴롭히는 상사들은 (이 판결로) 이제 ‘허용 면허’를 갖게 된 것”이라고 재판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