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가에 몰아친 구조조정의 격랑은 최대 7만 명에 달하는 은행원을 퇴출시켰고, 2개 시중은행의 경영권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등 5개 은행의 주인을 바꿔 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통폐합. 몸집을 키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 빠진 은행들은 살아남기 위해 합병을 통한 짝짓기에 여념이 없다.
은행들이 짝짓기에 열을 올리는 것은 향후 국내 은행 구도에서 상위권에 들지 못할 경우 생존하기가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미 국민과 주택이 결합했고, 상업+한일로 출범한 한빛은행도 1년도 채 안돼 다시 동화은행을 흡수하며 우리은행으로 재출범했다. 짝을 찾지 못해 좌불안석하던 하나은행과 서울은행도 마침내 불안한 한집살림에 동의하고, 합병이라는 이름 아래 생존경쟁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현재 시중 은행가의 시장판도는 국민은행(국민+주택), 우리은행(상업+한일+동화), 조흥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하나+서울), 외환, 제일, 한미, 소형 지방은행 등으로 짜여져 있다. 향후 이들 간에도 합병, 흡수 등 갖가지 형태로 결합할 가능성이 커 은행계의 지각변동은 진행형이다.
은행가에서는 향후 3년 이내에 국내 시중은행 판도는 4강, 혹은 5강 체제로 압축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2005년까지 매머드 은행을 중심으로 융합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중앙+중앙, 중앙+지방, 지방+지방은행간 합병도 봇물을 이룰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합병의 대열에서 탈락할 경우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은행의 생존게임에서 살아남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합병바람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전망.
시장지배력과 자산규모가 은행의 생존 여부를 가름하는 결정적 요소이기 때문에 은행가의 관심은 누가 얼마만큼 몸집을 키우느냐에 집중되고 있다.
현재 시중은행의 자산 순위는 추석 연휴를 계기로 통합 전산망 가동에 들어간 통합 국민은행(1백97조5천억원)이 단연 수위. 우리은행이 1백3조9천억원으로 통합 국민은행을 맹추격중이다.
신한은행을 축으로 금융계열사를 통합한 신한금융그룹이 74조7천억원으로 뒤를 잇고 있지만, 합병이 성사될 경우 통합 하나은행(하나 58조+서울 25조8천억원)이 자산규모 83조8천억원에 달해 업계 3위로 올라설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국민-우리-하나은행 순인 시중은행의 3강 체제도 1년 안에 다시 한번 요동칠 가능성이 더 크다. 신한은행과 한미은행과의 합병이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한미은행의 자산은 32조2천7백87억원. 따라서 신한과 한미의 합병이 설사될 경우 신한은행은 자산규모 1백6조9천억원에 달해 단숨에 2위인 우리은행마저 제칠 전망이다.
금융 전문가들은 한국 현실상 경제규모를 감안할 때 생존 가능한 은행수는 3개 정도라고 단정하고 있다. 여기에 규모의 경제나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최소한 자산규모 1백조원 이상이 되어야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
한미은행과 합병을 공언하고 있는 라응찬 신한지주회사 회장도 지난 9월 초 “한미은행과 합병 논의가 진행중”이라고 합병 논의가 끝나지 않은 작업에 대해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그는 합병 필요성에 대해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자산규모가 1백조원 이상, 1백30조원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한금융지주회사에 편입된 금융자회사들의 성장속도를 따지면 한미 등 다른 은행과의 합병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때문에 통합 하나은행의 출현으로 2~4위권의 은행들의 3강싸움은 더욱 치열해지게 됐다.
자산규모가 거의 2백조원대로 멀찌감치 달아난 국민은행을 빼곤 한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혼전을 벌이고 있는 것. 신한도 한미와의 합병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가격 등의 주요조건에 대한 의견차가 커 진통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2위권인 우리은행은 절대 안심하지 못할 처지다. 최근 무디스의 신용평가 등급을 보면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나란히 BBB+로 국내 은행 중 최상급 등급을 기록했지만 우리은행은 BB+로 처졌다. 또 상반기 순이익에서도 우리금융그룹은 당기순이익이 8백18억원에 불과했지만 신한은행은 3천60억원으로 재무건전성 면에서 앞서 있다.
현재 신한은행의 자산규모는 작지만 인수합병전에 나설 경우 순식간에 우리은행을 앞설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은행쪽에서도 추가 합병 가능성을 흘리고 있다. 일단 우리은행에선 대우증권 등의 합병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지주회사가 한미은행과의 합병작업을 공개했듯 우리금융의 윤병철 회장도 은밀히 작업해야할 대우증권 인수 문제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우리금융그룹에 자산규모 3조4천8백억원의 대우증권을 편입시키면 우리금융그룹의 자산규모는 1백6조원대로 뛰게 되며 신한이 한미와 합병해도 2위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된다.
두 회사 모두 인수합병을 통해 소비자 금융과 보험상품을 은행창구를 통해 판매하는 방카슈랑스쪽으로 매출을 다각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2위 싸움에서 벗어난 국민은행은 아직 여유가 있는 편. 김정태 행장은 “하나은행과 신한은행이 합쳐야 한다. 그럴 때에만 국민은행을 위협할 수 있다. 다른 자그마한 은행을 합쳐봐야 국민은행을 절대로 위협할 수 없다”고 공언하는 여유를 부리고 있다.
하나가 서울과 몸을 섞었고, 신한이 한미와 몸을 섞는다 해도 당분간 은행권의 합병을 통한 몸집 불리기 싸움이 끝난 게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은행들의 ‘몸싸움’이 어디까지 번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