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과 만남·말티즈 등장·남북합작 애니콜CF ‘실화’…‘총풍’ 영화에선 400만 달러, 실제론 1억 달러 제시
황정민·이성민 주연의 ‘공작’(제작 사나이픽쳐스)이 8일 개봉 이후 관객의 꾸준한 선택 속에 누적 420만 명을 넘어섰다. 스코어 대결이 치열한 여름 극장가에서 ‘흥행 순풍’을 맞고 있다. 영화를 향한 관심은 극장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대 대북첩보원으로 활동한 실존인물을 그리는 만큼 그 실물은 물론 당시 벌어진 일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영화 ‘공작’ 홍보 스틸 컷
# 대북 첩보원 흑금성 실화…김정일 만난 남한 스파이
‘공작’은 1980년대 후반부터 대북 스파이로 활동한 박채서 씨의 이야기에 대부분 바탕을 뒀다. 그의 활동명은 ‘흑금성’. 장교 육성기관인 육군대학을 졸업한 그는 안기부의 제안으로 군복을 벗고 정보요원으로 대북 첩보활동을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배우 황정민이 맡아 연기했다. 흑금성이 영화에서 벌이는 첩보전의 주요 줄거리는 실제 박채서 씨가 겪은 일과 겹친다.
흑금성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북으로 간 스파이’. 이는 영화 ‘공작’의 캐치프레이즈로도 쓰인다. 1993년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자, 흑금성은 북핵 실체를 캐기 위해 북한 고위층 내부로 잠입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도입부에서 흑금성이 북한과 접촉하기 위해 벌이는 몇몇 공작이 등장한다.
중국 조선족 핵물리학자를 유인해 자녀의 미국 유학을 미끼로 정보를 제공받는 상황, 중국에서 농산물 ‘포대갈이’ 사업을 하던 북한 유력 인사의 아들을 공안에 붙잡히게 하는 내용까지 전부 흑금성이 벌인 공작 실화다. 대북 첩보원이 어떻게 북한으로 잠입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면서,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 장면들이다.
영화에서 흑금성은 대북사업가로 정체를 숨기고, 베이징 주재 북한 고위 간부인 리명운(이성민 분)에 접근한다. 북핵 실체를 파악하는 첫 걸음. 리명운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북한 인사 역시 실제 흑금성 공작 대상이던 리철이란 인물이다. 그의 신임을 얻은 흑금성은 북한 권력층의 신뢰까지 얻고, 마침내 북한에서 김정일을 만난다. 쉽게 믿기지 않는 내용이지만 이런 내용 역시 실화다.
영화 ‘공작’ 홍보 스틸 컷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은 우리에겐 ‘갈 수 없는 단 하나의 나라’로 통했다. 그런 북한에 들어가 김정일을 만나 대북사업을 논의하는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이 역시 흑금성이 직접 벌인 공작이다. 그는 1997년 6월 북한에서 김정일을 만났다. 영화 개봉 뒤 흑금성의 실제 모델인 박채서 씨는 몇몇 매체와 인터뷰에서 김정일과의 만남은 물론 장성택 등 북한 고위 인사와 만나 그들과의 대화를 전부 녹음했고, 녹음파일은 자신만 아는 모처에 보관 중이라고 밝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허구의 설정이 의심되는 몇몇 장면이 실제인 경우도 있다. 흑금성과 김정일의 첫 대면에 등장하는 반려견이 대표적이다. 긴장이 고조되는 이 장면에 먼저 나타나는 건 작은 흰색 말티즈. 연출을 맡은 윤종빈 감독은 “북한 관련 서적 중 탈북 시인 장진성이 쓴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라는 회고록에서 시인이 김정일과 만났을 때의 기록을 상세하기 적어 놓은 부분을 인용했다”며 “시인이 김정일 별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데 강아지가 먼저 들어와서 발을 핥았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도 김정일은 별장마다 시츄, 말티즈 같은 반려견을 많이 키웠다고 한다”고 밝혔다. 그야말로 ‘깨알같은’ 실화 묘사다.
흑금성을 대북사업가로 알고 만난 김정일은 그에게 북한에 있는 골동품을 판매해 줄 것을 제안한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은 북한에 있는 고구려 시대 유적 등 골동품 판매에 관심을 둔 것으로도 알려졌다.
# 이효리·조명애 애니콜CF도 흑금성 작품?
흑금성은 아자커뮤니케이션이란 회사의 이사로 위장해 대북사업을 벌인다. 북한의 신임을 얻은 뒤 흑금성이 꺼낸 사업 아이템은 금강산과 백두산 등지에서 광고를 촬영하는 것. 영화에선 북핵 실체 파악을 위해 “자유롭게 카메라를 들고 북한 방방곡곡을 촬영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광고촬영을 사업 아이템으로 결정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영화 ‘공작’ 홍보 스틸 컷
실제로 흑금성은 1997년 금강산 등 북한 주요 지역에서 5년 동안 독점적으로 남한 광고를 촬영하는 계약을 따냈지만 ‘북풍 사건’이 드러나면서 중단됐다. 하지만 흑금성이 주도한 북한 광고 촬영이 아예 물거품이 된 건 아니다. 2005년 이뤄진 남북합작 광고 탄생에는 흑금성 즉 박채서 씨의 물밑 진행이 상당한 공을 세웠다. 당시 가장 핫한 스타인 가수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함께 출연한 애니콜 광고는 그렇게 탄생했다.
‘공작’은 윤종빈 감독이 안기부를 취재하던 과정에서 탄생했다. 당초 안기부 소재의 영화를 구상하던 감독은 자료조사와 취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흑금성의 존재를 찾아냈다. 하지만 영화화를 원하던 무렵 박채서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돼 있던 상태. 감독과 제작자는 박채서 씨 가족과 먼저 만나 상의했다. 직접 면회를 신청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여러 위험성을 고려, 가족 등 대리인을 통해 서로 의견을 나눌 만큼 영화화 과정 자체도 첩보전을 연상케 했다.
흑금성을 연기한 황정민은 “영화를 처음 기획하고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며 “촬영하면서 우리끼리 ‘어디 조용한 곳에 끌려가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다가도 ‘우리 아니면 누가 이걸 만들겠냐’고 용기를 냈다”고 밝혔다.
뭐니 뭐니 해도 ‘공작’의 핵심은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 벌어진 ‘북풍 사건’이다. 당시 안기부와 집권여당 인사들이 북한과 접촉해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내용. 판문점 총격전을 일으킨 ‘총풍’에 이어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북한에 무력시위를 부탁한 안기부 주도의 작업이다. 영화에선 당시 안기부가 북한에 제시한 금액이 400만 달러로 묘사된다. 하지만 박채서 씨는 최근 방송에 나와 “400만 달러가 아닌, 실제론 1억 달러(1000억 원)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