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쓴 거 후회한다…후배들에겐 사업하라 권유”
‘전설’ 출판기념회로 화제가 된 조창조 씨. 그는 일대일 싸움에서는 진 적이 없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조 씨의 이날 모임에 신상사파 신상현 씨, 부산 칠성파 이강환 씨는 축전을 보냈고, 용팔이 사건 주범 김용남 씨 등 주요 두목급 조폭들이 참석했다. 주먹계에서는 “파벌을 떠나 두루두루 큰형님으로 대접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조창조 말고는 꼽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이외에도 이수성 전 국무총리, 조 씨의 대륜고 3년 선배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재오 전 특임장관, 이의익 전 대구시장, 김동길 박사 등도 출판을 축하했다.
6일 조 씨를 그의 자택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그가 언론 인터뷰에 응한 건 10년 만이자 평생 두 번째다. 조 씨는 나이 80이 넘었지만 여전히 정정해 보였다. 보자마자 그의 큰 주먹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실물로 본 주먹 중에 가장 컸다. 조 씨는 출판기념회로 화제가 된 것을 아느냐는 질문에 손사래치며 “사람들 눈을 의식해 현역은 참석을 자제시켰는데도 그렇게 됐다”며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는 “우리 시대는 지금과 다르다. 지금 시대에선 상상도 못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해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일대기를 다룬 ‘전설’이란 책을 낸 계기는 뭔가.
“여러 사람이 책을 출간하자고 했다. 난 못하게 했다. 할 생각도 없었다. 그때마다 ‘이게(주먹)이 무슨 책이냐. 웃기지 마라’고 했다. 그런데 큰아들이 ‘이렇게 끝내기에는 서운하다’며 2개월을 졸랐다. 모교 선배이자 나에게 힘이 돼주신 분도 ‘야, 하자. 너 나이도 80이다. 세상사람이 욕하면 어떠냐’고 하기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래 하자’라고 해서 시작된 거다. 출판기념회도 안하려고 했는데 김동길 박사가 이북말로 ‘야 해봐, 시시껍절한 놈들도 책 쓰지 않니?’라고 했다. 사회에 보탬이 안 되고 누를 끼치게 되면 안 되는데 걱정이다. (미화했을까봐) 사실 나온 책도 안 봤다.”
―출간 작업은 어떻게 했나.
“작가와 여러 번 만나 녹취록으로만 수십 시간의 인터뷰를 해서 만들었다. 나 이외에도 주변 사람들도 작가가 만나 인터뷰해 책에 담았다.”
―어렵게 작업했는데 내용이 어떤지 궁금하진 않나.
“궁금은 하다. 그런데 부끄러울까봐 정말 못 보겠다. 다만 솔직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고 작가에게도 주문했다. 불리할 땐 잠시 도망가기도 하고 이기기 위해선 눈 찌르기나 급소를 공격했던 장면도 다 담았다.”
―책을 보면 주먹으로 이기면 곧바로 인정을 한다. 실제로도 그랬나.
“정말 그렇다. 그게 우리 시대다. 칼도 없이 일대일로 싸울 때다. 치고받기 시작하면 구경꾼들이 몰려 이기면 이겼다, 졌으면 졌다고 상대도 인정하고 세간에도 금방 퍼졌다. 그렇게 싸워도 다시 친하게 지냈다. 내가 스무살 때 이야기다. 시기로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개헌을 한 이후부터 떼싸움으로 변했다.”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전설’ 출판기념회에서 조창조 씨가 발언하고 있다.
―맨손 싸움으로 한 번도 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로 불린다. 비결이 뭔가.
“상대한 사람 중에 큰 사람도 있었지만 그땐(활동하던 1950년대) 신장이 160cm도 안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대에 내가 177cm 정도였다. 김두한 형님, 시라소니 형님도 컸지만 나보다 작았다. 체격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보다 재주가 좀 있었다. 다양한 격투기를 배워서 유도를 잘하는 사람에겐 씨름으로, 씨름을 잘하는 사람은 권투로 상대해 이겼다. 그렇게 일대일 싸움을 잘한다고 알려지면서 서른이 되니까 유명인이 됐다. 체격도 큰 데다 유명세가 있다보니 그 뒤에는 붙으러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수없이 많은 싸움을 했다. 가장 인정할 만한 상대는 누구였나.
“다 아는 사람들인데 누가 어떻다고 평가를 못한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
―드라마 ‘야인시대’는 봤나.
“공감을 많이 느꼈다. 드라마에 나온 분들을 형님으로 다 불렀다. 그분들이 다 살아 있었다. 내가 워낙 어려서 대부분은 터놓고 지내지 못했다. 그중에선 ‘명동 오야붕’ 이화룡 형님이 이북 출신으로 동향이라 날 참 좋아했다.”
―그들은 ‘야인시대’처럼 멋지게 차려 입고 다녔나.
“그런 건 없었다. (조폭들이) 정장 입고 다닌지는 얼마 안 됐다. 90년 이후에나 생겼다. 행사장 가면 까만 옷 입고 90도로 인사하는 문화가 없었다. 그 이전까지는 편한 옷 입고 다녔고 30도 정도로 인사했다.”
―서른에 유명세를 얻기까지 과정은 어땠나.
“평양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8세 때 월남해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다니다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 경상북도가 굉장히 배타적인 곳이다. 초등학교에 가면 ‘어이 서울내기’라고 했다. 때리면 맞서 싸우다보니 국민학교 때부터 대장을 했고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살다보니 대구 12개 학교 ‘가다’(어깨를 뜻하는 일본어)가 됐다. 자리를 잡고 난 다음에는 경상북도에서 싸움 잘한다는 사람 있으면 기차 타고 싸우러 갔다. 싸워본 사람 중에 유도나 권투 대회 우승자도 있었다. 유도로 하면 내가 지지만 싸움은 다르다. 무도인들은 싸움꾼들과 다르게 때로는 사실상 졌을 때도 다시 도전을 받았다. 몇 번을 도전해 그런 우승자를 이기면서 유명해졌다.”
―제일 강했던 나이는 몇 살이었나.
“나이가 23~27까지가 전성기였다. 열심히 운동도 해서 빨랐고 유연했다. 자신감도 있었다. 그 이후에 큰아들이 태어나면서 사람이 달라지더라.”
―싸움을 순수하게 좋아했던 것 같다. 격투기 선수 생각은 없었나.
“그땐 지금 같은 주짓수 같은 해외 격투기는 없었고 격투기로는 권투, 씨름, 유도, 당수도(태권도), 아마추어 레슬링. 이 5개 종목이 전부였다. 열심히 배웠다. 하지만 당시에는 복싱 챔피언도 굶으면서 활동할 때다. 밥먹기 힘든 시대였다. 이북에서 홀어머니 모시고 내려와서 정말 가난했다. 지금 생각으로 보면 안 된다. 염천시장 있던 곳에 오랜만에 가보니 빌딩 숲에 공원이 만들어져 있더라. 그곳에 거지떼, 생선시장, 청과시장 있었다 하면 믿겠나. 감안해서 봐달라.”
―어떤 시대였다고 생각하나.
“우리 시대는 가장 막장시대다. 해방되고 6·25라는 아픔 겪고, 헐벗고 살 때 주먹들이 활동했다. 밥 제대로 먹었으면 키도 훨씬 컸을 것 같다. 거지들도 떼로 다니고 무법천지였다. 지금 보면 젊은 후배들이 전쟁도 안하고, 싸움도 안하는 거 보면 상당히 발전했다고 본다.”
―후배들에게는 뭐라고 하나.
“후배들에게 ‘거짓말 안하고 주먹으로 전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런데 남은 게 뭐가 있냐’고 말한다. 오히려 건달하다가 사업한 사람 중 성공한 사람이 많다. 건달 생활에 너무 집요하게 매달렸다. 이거 사실 바보들이나 하는 짓 아니냐는 생각도 했다. 후배들에게 대놓고는 말 못하지만 책에만은 남겨 주고 싶다. ‘주먹할 바에는 사업하라’고. 그게 국가에도 도움되는 일 아니냐.”
―주먹으로 전설이 됐다. 주먹 쓴 걸 후회한 적도 있나.
“후회했다. 왜 후회를 안하겠나. 안 썼으면 잘 살았을 텐데. 내가 사람들에게 거짓말 안하고 정직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본 사람은 ‘조창조 정직하다’고 믿어준다. 출판기념회에 모인 사람들도 그래서 모인 거다. 만약 그 믿음을 얻은 상태에서 사업을 했다면 얼마나 큰 이익이 있었겠냐. 어쨌건 이제 늙었는데 후회하면 뭐하나 싶다. 단 하나 두 자식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그것 말고는 없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인가.
“큰아들 안고 밖에 나왔을 때 가장 행복했다. 그 이후 세상에서 자꾸 밀려났다. 전국적으로 수배도 됐다. 큰아들에게 죄를 많이 지었다. 돌이켜봐도 행복한 시절을 꼽기가 어렵다. 가난했고 살기 힘들었다. 행복하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아들들도 아버지 따라 운동 신경이 좋을 것 같다.
“아들 둘다 체격이 큰데 운동을 안 시켰다. 더군다나 우리 같은 세계에는 발걸음도 못 오게 했다. 나 같은 길은 갈 길이 못된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