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잘 때 못 자고, 남들 먹을 때 못 먹고…고강도 순환근무 ‘예보국’ 직원들 사이서 인기 꽝!
기상청이 예보 오보로 신뢰를 잃고 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주재로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서울상황센터에서 열린 호우 대처 상황점검회의에서 관계자들이 기상청 관계자의 보고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기상청은 환경부 산하기관으로 기상법 제1조에 따라 자연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공공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기상예보를 발표한다. 기상청 인력 구성은 1366명이고 지역별 9개청과 국가태풍센터,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 항공기상청 등 산하에 9개 기관을 두고 있다. 기상청장은 차관급으로 연봉 1억 원대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상청은 실황예보, 초단기예보, 단기예보, 중기예보의 4가지 예보를 하고 있다. 실황예보는 30분~1시간 뒤 기상을 예보하는 것이고, 초단기예보는 3시간까지, 단기예보는 3일, 중기예보는 4~10일 뒤를 예측한다.
이 예보를 맡고 있는 것이 예보관들이다. 각종 자료를 검토해 예보를 결정하는 예보관은 20명이다. 20명이 4조로 나뉘어 낮밤 12시간씩 오전 8시~저녁 8시, 저녁 8시~오전 8시로 근무가 24시간 돌아간다. 예보를 하기 위해 예측의 토대가 되는 자료분석 인력, IT인력, 홍보 등 행정담당 인력 등 예보국 내 업무가 다양하다.
기상청에서는 하루에 두 번 예보 회의가 열린다. 첫 번째 회의는 야근조가 퇴근하고 일근조가 출근할 때 이뤄진다. 밤새 벌어진 기상상황과 변동사항 등을 브리핑하고, 이를 넘겨 받는 식이다. 두 번째 회의는 오후 2시에 진행되는데 기상청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다. 2시 예보회의에는 예보분석팀과 예보생산체계 전문화를 위한 태스크포스팀이 참석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공개토론이 진행된다.
2시 예보회의가 끝나면 각 도 단위 지방예보관과 화상회의를 통해 전국 기상예보 최종안을 결정한다. 여러 예보관의 주장이 엇갈리고 서로 다른 판단을 내놓지만, 이를 종합해 하나의 예보를 결정하는 것이 총괄예보관의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관보다도 많은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진다.
예보회의에서 예보관들이 각자 주장을 펼치는 토대는 여러 자료다. 2시 예보회의를 위해 자료분석팀은 12시부터 2시전까지 자료를 준비한다. 이 때문에 점심시간이 없다. 더욱 정확한 예보를 위해서는 더 정확하고 다양한 데이터가 필수다. 기상청은 4차원 자료를 모두 활용하는데 지상자료, 저층대기자료, 고층대기자료, 각 바다의 상황, 위성자료, 해외자료 등이 이에 포함된다.
많은 자료를 분석해야 하고, 변화무쌍한 기상변화 탓에 예보관으로 일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 기상전문가들의 평가다. 기상청 내에서도 예보국은 업무강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순환근무 특성상 예보국을 굳이 가려고 하지 않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2교대 근무도 예보관의 고된 특성 중 하나다.
당직 근무를 교대로 서는 직업이 많지만, 야간시간을 지킨다는 의미가 강한 타기관과는 기상청의 야간근무 성격이 다르다. 기상청 야간근무조는 낮에 하는 업무량과 같은 업무를 해야 해 업무 강도가 높다. 공무원법에 따라 야간근무자들은 당직수당과 추가수당 등을 적용받고 있다. 기상업계에 따르면 예보관을 해도 업무강도에 비해 수당이 낮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상업계 한 관계자는 “기상청에서는 한 방에서 4명 중 3명이 석박사 출신이다. 그런다고 연봉이 높지도 않은데 근무강도는 높아 선호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낮에 수많은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업무강도가 높은 편인데, 남들이 다 자는 시간에 집중하는 것이 신체리듬상 쉬운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
우리나라 예보의 역사 살펴보니…러일전쟁 때 ‘박차’ 한국전쟁 때 ‘업글’ ‘1905년 11월 1일 예보 맑음.’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905년의 예보가 현존하는 최초의 예보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근대기상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1904년 설립된 총독부 산하 기상관측소를 근대 기상청 설립 시기로 전제한 셈이다. 이를 두고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 주도의 관제를 기준으로 기상청 전신을 가늠한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이다. 정부조직의 공식적인 기상관측 활동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설정돼 있지 않다. 기상관측을 위한 조직과 규정에 따르면 천문기상대 관제에 대한 최초 기록은 태조실록의 1392년 7월 정미일 ‘정문부백관지제’에서 나타난다. 그 후로도 기상관측 업무는 계속됐지만 조선 후기 정치사회가 불안정함에 따라 기상업무나 관련 조직이 발전하지 못했다. 기상업무에 박차를 가한 것은 러일전쟁을 위해 기상정보가 필요했던 일본의 의지였다. 일본은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측소를 열고 와다유지가 총독부 초대 관측소장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모든 기상업무는 거의 일본인 직원이 수행했다. 광복 후 국립중앙관상대가 조선총독부기상대를 접수했지만 기상업무에 필요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문교부 산하의 국립중앙관상대는 교통부와 과학기술처로 이관됐다가 1982년 국립중앙기상대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0년 기상청으로 승격됐다. 우리의 기상관측 수준은 한국전쟁 중 미군의 협조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국립중앙관상대는 1953년부터 1960년대에 걸쳐서 직제정비와 각종 법령을 마련했다. 기상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기술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기상기술원양성소 관제가 1958년 공식적으로 공포됐다. 양성소에서 교육을 받으면 기상청 9급 공무원으로 채용되는 식이었다. 2000년에 기상업무 전용 슈퍼컴퓨터가 최초로 도입됐다. 슈퍼컴 1호기로 일본 NEC사의 ‘SX-5 시스템’을, 2005년 기상용 슈퍼컴 2호기로 크레이사의 ‘X1E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후 3호기로 크레이사의 ‘XE6 시스템’, 현재 4호기로 크레이사의 ‘Cray XC40 시스템’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2011년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슈퍼컴퓨팅의 체계적인 육성을 위한 ‘국가초고성능컴퓨터의 활용과 육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