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덕후부터 그림 파는 ‘성덕(성공한 덕후)’까지...제작 환경도 ‘덕후’ 친화적으로 변모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나 노트를 구입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 단순히 덕질 차원을 넘어서서, 상품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더 이상 덕후들은 소비자가 아닙니다. 적극적인 생산자로 시장에 뛰어 들었습니다. 이들이 ‘인스(인쇄소스티커)’, ‘떡메(떡메모지, 포스트잇과 비슷하지만 접착력이 없는 단면 메모지)’, ‘마스킹테이프’ 등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카오톡 이모티콘 인기 순위. 인기 순위 7위의 ‘엄마와 딸’은 익숙한 캐릭터가 아닌 현실을 고스란히 담은 손그림이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샵 캡처
디즈니의 대표상품인 미키마우스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카카오톡 이모티콘 인기 순위에 유명 캐릭터 대신 개인 작가들이 직접 만든 캐릭터가 가득한 이유입니다. 젊은 층은 디즈니 만화 캐릭터나 일본 만화 캐릭터에 열광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캐릭터에 집착합니다.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덕후들을 소개합니다.
12일 방문한 워터멜론 오프라인 매장의 전경. 매장 안에는 ‘인스(인쇄소스티커)’, ‘떡메(떡메모지)’ 등을 판매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워터멜론은 덕후가 만든 문구류를 판매하는 곳입니다. 방문자 수는 주말 기간 동안 하루 400명에 육박합니다. 황대연 워터멜론 대표는 워터멜론이 창작가와 판매자를 이어주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워터멜론에 소속된 프리랜서 작가들은 총 22명, 그중에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디자이너 모집 공고 속 나이 제한은 14세 이상, 실제 주 고객층도 10~20대입니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인스’와 ‘떡메’를 수집하는 일이 유행입니다.
12일 상수역 인근에 위치한 워터멜론 매장에서 초등학생 손님이 스티커를 고르고 있다. 이종현 기자
‘초딩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이곳에 마침 꼬마 손님이 왔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스티커를 고릅니다. 함께 온 어머니는 “부산 사는 친척의 부탁을 받고 방문했다”고 설명했습니다.
12일 워터멜론 황대현 대표가 매장에서 직원과 함께 랜덤박스를 포장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인기상품인 랜덤 박스(랜덤으로 다양한 제품들을 박스에 넣어 파는 것)를 포장하는 황 대표를 만났습니다. 황 씨는 개인 디자이너들의 성공을 음식점에 비유했습니다. “예전에는 프랜차이즈 식당을 많이 갔잖아요. 근데 이젠 개인 식당을 막 찾아가요”라는 황 씨의 설명처럼 예전에는 유명하고 대중성 있는 것들이 대세였다면 이젠 독창적인 것이 추앙받고 있습니다. 황 대표는 “저희끼리는 ‘B급 감성’이라고 불러요”라며 취향이 점점 다양해진다는 게 덕후들이 성공하는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손지혜 작가가 필명 ‘핑크펄’로 활동하며 만든 작품들. 이종현 기자
평범한 디자이너였던 손지혜 씨(여․22) 는 어렸을 때부터 스티커와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하던 덕후였습니다. 그는 “그리고 싶은 그림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손 씨는 현재 워터멜론 소속 디자이너로, 필명 ‘핑크펄’로 일하고 있습니다.
정유선 작가가 필명 ‘무선이’로 활동하며 만든 작품들. 이종현 기자
정유선(여․22) 씨는 이전의 회사를 그만두고 워터멜론의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정 씨는 ‘무선이’라는 필명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는 “제가 원하는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는 게 제일 좋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소녀들이 이젠 다른 사람들에게 그림을 파는 ‘성덕(성공한 덕후)’이 되었습니다.
‘떡메’ 제작 가격은 500장에 6,600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애즈랜드 홈페이지 캡처
제작 환경도 ‘덕후’ 친화적으로 변했습니다. ‘인스’는 이름 그대로 인쇄소에 맡긴 스티커를 뜻합니다. 예전에는 인쇄소에 스티커 제작을 맡기면 한 번에 1만 장은 넘게 제작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1000장까지 소량 제작이 누구나 가능합니다. 워터멜론 소속 디자이너 정현진(여․24) 씨는 “한 번 만드는데 성인이 부담할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인스’ 1000장 제작 가격은 5500원이었습니다. 손 씨도 “예전엔 한 번 스티커 만들려면 공장을 찾아가야 했는데, 이젠 인터넷에서 클릭만 하면 된다”며 거들었습니다. 개인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대학생 유다은(여․21) 씨도 “인터넷에 ‘인스 제작‘이라고만 검색해도 방법을 정리해 놓은 글들이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유다은 작가가 필명 ‘모찌’로 활동하며 사용하는 SNS 계정. 인스타그램 캡처
유 씨도 취미로 시작했던 그림 그리기로 성공한 덕후입니다.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용 SNS에 직접 그린 그림도 함께 올리던 유 씨는 누군가 ‘제발 인스로 만들어주세요’라고 요청해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유다은 작가가 필명 ‘모찌’로 활동하며 만든 작품들(왼). 직접 물품들을 활용해 다이어리를 꾸민 모습. 인스타그램 캡처
유 씨가 활동하는 필명은 ‘모찌’입니다. 11월에는 ‘도쿄디자인페스타’에도 출품하기로 했습니다. 대학생이던 유 씨가 만든 캐릭터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 씨는 자신이 만든 ‘떡메’나 ‘인스’를 활용한 일기장을 SNS에 올립니다. 그가 쓴 일기장을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유 씨의 제품을 사고 싶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들은 SNS의 발달을 성공의 이유로 꼽습니다. SNS를 통해 홍보와 판매를 모두 해내기 때문입니다. 유 씨의 주 판매 채널은 블로그로 인스타그램, 블로그, 트위터에 작품 사진을 올리고 판매는 블로그 마켓으로 하고 있습니다.
워터멜론 매장에 진열된 다양한 ‘인스(인쇄소스티커)’. 이종현 기자
워터멜론도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사이트를 동시에 운영 중입니다. 매장 오픈 시간이 4시인 것도 4시까지는 온라인 배송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손 씨는 “판매도 예전 같으면 찾아가서 판매했는데, 이젠 댓글로 ‘살게요‘라고 말하고 팔고 살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덕후’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던 예전과 달리 이젠 ‘덕후’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왔습니다. 꼭 캐릭터나 그림 덕후만이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배달앱 업체에서는 치킨 덕후 ‘치믈리에’를 뽑는 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우받는 세상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무얼 좋아하시나요?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준비가 되셨나요?
구단비 인턴기자 danbi@ilyo.co.kr
누구나 참여 가능한 펀딩 플랫폼에서 ‘덕후력’ 뽐내기 악마가 좋아서 전 세계 악마를 사전으로 정리하겠다는 제작자가 있기도 하고, 다양한 색이 좋아 외국에서만 발간된 책을 직접 번역해 출판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텀블벅은 전문적 스킬을 가지지 않아도 누구나 원하는 것을 제작할 수 있도록 제작자와 팬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제작자는 ‘텀블벅’에 자신이 기획하는 제품을 올리고, 소비자들은 설명을 읽고 후원을 결정하는 방식이죠. 텀블벅에는 사회적 공헌 사업과 같은 의미 있는 일도 많지만, 그냥 ‘좋아서’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의 프로젝트도 자주 올라옵니다. 자몽덕후 이현석 씨가 시작한 자몽향수 프로젝트는 1600%의 달성률을 기록했다. 텀블벅 캡쳐 이현석 씨는 자몽이 좋아 직접 자몽향수를 만들게 됐습니다. 이 씨가 올린 프로젝트는 목표로 했던 100만 원을 훌쩍 넘은 약 1600만 원의 금액을 모았고, 372명의 구매자들이 향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씨는 조향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자몽을 좋아하는 그는 취향에 맞는 자몽향수를 찾다 지쳐 자비를 들여 조향사 수업을 듣게 됐습니다. 이 씨에게 왜 향수를 만들게 됐냐고 물어보자 “내 덕질을 누구든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372명의 사람들이 이 씨의 향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씨는 지금 이 상황이 얼떨떨하다고 말했습니다. 덕질을 하다 이렇게 인터뷰도 하게 된 게 재밌다고 웃었습니다. 왜 이 이름 없는 향수를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걸까요? 이 씨는 텀블벅과 같은 펀딩 플랫폼의 발달을 이유로 꼽았습니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는 13일 기준 483개의 프로젝트가 올라와 있다. 텀블벅 캡처 실제로 텀블벅에는 13일 기준으로 483개의 프로젝트가 올라와 있습니다. 이 씨처럼 무언가를 좋아하는 ‘덕후’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창작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인터넷의 발달로 흐려지면서 누구나 ‘덕후력’을 뽐낼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앞으로는 더 많은 덕후들이 만든 제품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