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마약 같아…혼자 기차표도 못 끊는 바보 된다”
국회의사당 전경. 박은숙 기자
한 전직 의원은 “낙선 후 지방에 갈 일이 있어 기차표를 끊으려고 했더니 낯설더라. 국회의원일 때는 지방출장 일정을 잡으면 보좌진들이 다 알아서 해주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몇 년 만에 직접 기차표를 끊으려고 했더니 (발권)시스템도 다 바뀌어서 (표를 끊는 방법을 알 수가 없어서)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정치인이 버스요금이나 생필품 가격을 몰라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있는데 어쩌면 당연하다. 국회의원 두 번만 하면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특별히 할일이 없어도 매일 여의도로 향한다는 전직 의원도 있다. 그는 하루 일과 대부분을 정치권 인사를 만나며 보낸다. 약속이 없어도 국회 주변 카페를 찾아 시간을 보낸다. 국회를 떠나 있으면 정치 감각이 떨어질 것 같다는 이유다.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호선 전 의원은 낙선 후 달라진 점에 대해 “아무래도 현직에 있을 때는 매일 찾아오는 사람들로 주변이 늘 북적북적하지만 낙선 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서운하기도 했다. 현재 시민단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행사 할 때 장소 대관하는 것도 (국회의원 시절과 비교하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헌정회의 회원 수는 2932명(2017년 3월 기준)이다. 이중 생존해있는 전직 의원 수는 1108명(현직 의원은 특별회원)이다. 지난 20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초선의원은 132명이었다. 선거 때마다 100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새로 배출된다.
전직 정치인들의 삶을 엿보기 위해 헌정회를 방문하고자 했지만 헌정회 측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헌정회 회원과 미리 인터뷰 약속을 해야 출입할 수 있다고 했다. 내부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직원은 “일반적인 경로당과 비슷한 분위기”라고만 설명했다.
한 의원실 보좌진은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직종이 아니면 국회의원 하고 나서 다시 일반 직장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그러다보니 계속 정치에 도전하게 된다. 정치는 한번 발을 들이면 도박이나 마약처럼 끊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 보좌진의 말처럼 국회 주변에선 전직이란 이름으로 수년간 정치권을 떠도는 인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과거 낙선 정치인이 선거에만 매달리다 재산을 탕진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정치인은 낙선 후에도 방송패널로 활동하거나 강연, 출판 등으로 생활이 가능하지만 일부는 선거판만 전전하다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한다.
앞서의 정 전 의원은 “헌정회 활동을 하다보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의원들을 의외로 흔하게 볼 수 있다”면서 “국회의원 연금을 없앤 것은 잘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국회는 만 65세 이상 전직 국회의원에게 월 120만 원의 연금을 지급한다. 국회로부터 제출받은 ‘헌정회 연로회원지원금’ 수급자 현황을 살펴보니 가구 월평균 수입이 한 푼도 없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국회는 특권 내려놓기의 일환으로 19대 국회 당선자부터는 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직 정치인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가는 은밀한 스폰 제의를 받는 경우도 흔하다. 정 전 의원 역시 “낙선 후 여러 종류의 스폰 제의를 받아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무 명분 없이 전직 정치인에게 돈을 주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주로 기업 고문이나 대학 특임교수 등으로 임명한 후 급여를 지급한다. 출근은 하지 않고 수백만 원의 급여만 타가는 경우도 흔하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은 지난 2015년부터 건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했지만 강의나 연구 활동은 하지 않고 매달 300만 원의 급여를 타갔다. 건국대 측은 김 전 비대위원장이 젊은 석박사들에게 자문을 해주거나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형태로 학교에 도움을 줬다고 해명했다.
송인배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야인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 후원회장이었던 고 강금원 회장의 골프장에서 웨딩사업 담당 이사로 근무했다. 송 비서관은 매달 300만 원을 급여로 받았지만 골프장에서 결혼식이 열린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은수미 성남시장은 낙선 후 자연인 시절 조폭 출신 사업가로부터 운전기사를 제공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은 시장 측은 자원봉사자인 줄 알았다고 해명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일부에서 낙선 정치인들에게 스폰을 제의하는 이유에 대해 “낙선 정치인을 통해 정치권에 줄을 대기 위함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또 낙선 정치인이 야인으로 지내다 선거 승리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정치인이 낙선 후엔 다시 생업에 종사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상규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당 해산 결정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후 공사현장으로 돌아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기갑 전 의원은 농사꾼으로 변신했다. 물론 이들의 행보가 정치 복귀를 염두에 둔 ‘정치 쇼’라는 평가도 없지는 않다. 이 전 의원은 최근 민중당 대표에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복귀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